자영의 말에 일대가 조용해졌다. 티틀조차 그녀의 대답에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얼음장이 된 그곳에서 자영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그건 언니를 모욕하는 행위야. 바이젤루스, 넌 죄책감을 느끼고 있겠지. 그걸 이렇게 무마하고 안도할 정도로, 넌 멍청하지 않아.
두 번째. 넌 나에게 죽음을 명령할 권리가 없어. 이건 내 의지로 행하는 거야.”
바이젤루스가 천천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다.”
에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생각이었구려, 바이젤루스. 이해가 된다오.”
“헹, 그래서 도와준다는 거야 뭐야?”
티틀이 콧방귀를 뀌었다. 바이젤루스가 그 말을 듣고 뒤를 돌아봤다. 그는 얘기했다.
“아예 다른 선택지를 골랐으니, 돕지 않을 거다. 다만,”
“다만?”
“지금 오고 있는 녀석들은 모르겠는걸.”
“치즈, 도착이야!”
“돌고 돌아서 일점산이네.”
티틀은 자수정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치즈 일행의 목소리를 포착했다. 그와 동시에, 분신을 이루고 있던 식충 무리가 자수정 벽을 넘어 티틀에게 도달했다. 그가 손을 뻗자, 그들은 황색 구름과 같이 퍼지며 티틀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분신을 회수한 그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봐봐 다예람. 내 말처럼 될뻔했네?”
“윽…”
티틀과 다예람의 발 밑에 검푸른 빛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라인더가 나무를 갈아버리는 소리가 들리며 지표면이 흐물흐물 요동쳤다. 이어 뒤에 대기 중이던 색채귀 군단들부터 점차 땅 밑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두 딜러도 연달아 웅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이좋게 죽기엔 시기가 일러. 수 싸움은 비긴 걸로 치자. 다음에 보자고?”
티틀의 말을 끝으로 자수정 벽 내부의 색채귀들은 웅덩이 밑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퀴스피드의 영역이 점차 작아지다가, 이내 백지에서 모습을 감췄다. 바이젤루스는 조용히 서서 그들이 완전히 퇴각하는 것을 지켜봤다.
자수정 벽 내부가 조용해졌다. 토악질 나는 냄새와 영역의 기운들은 대기로 퍼져 종적을 감췄다.
“쫓을 필요는 없소?”
“어차피 다시 만나게 될 거다. 무엇보다 이건 자영의 일이다.”
바이젤루스가 그녀를 바라보자, 자영은 시선을 회피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수정 벽 위를 바라봤다. 자수정 벽 밖으로 빛이 물러나고, 저녁의 색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치즈와 에디, 큐 파인드와 지미가 날아오고 있었다. 마치 밤을 끌고 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지러이 휘몰아치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갔다.
같은 시각, 메어 일행.
“이 숲, 얼마나 큰 거야? 아직도 끝이 안 보여.”
“미로 같은 느낌이다. 같은 곳을 맴돌고 있을지도.”
“아, 저길 봐!”
메어의 횃불이 바유의 옆을 가리켰다. 불꽃이 향하는 곳으로 걸어가자, 나무의 기세가 점점 한산해졌다. 어두운 분위기의 아우성도 점점 옅어지며,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고하고 있었다.
숲을 통과하는 동안 반나절이 가버렸다. 일찌감치 저녁색은 물러갔고, 새벽의 칠흑이 선명했다. 그들은 남은 새벽을 보내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출구 쪽에 꽤 커다란 구멍이 뚫린 고목이 보였다. 고목의 내부에는 메어와 옅은 이들이 모두 들어가고 남을 만큼, 넓은 공간이 있었다. 메어는 거의 다 타가는 횃불을 밟아 불씨를 꺼뜨렸다. 그들은 조용히 고목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메어의 영역이 옅어지고 기척이 사라졌을 때 즈음, 숲의 그림자 밑에 숨어있던 존재들이 모습을 보였다. 흑백으로 칠해진 몸, 세 장의 날개를 가진 요정, 백지령이었다. 뽀송뽀송한 질감을 갖고, 롤러붓을 닮은 모습이었다. 주위에서 신비로운 선율의 피아노 소리가 하늘거렸다. 그들은 백지 위의 영역의 흔적과 덩어리를 조금씩 먹어치웠다. 백지령의 효소와 맞닿으면, 그것들은 다시 백색의 모래가 되어 무로 돌아간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을 만큼 일어나는 순환이다. 녀석들의 청소가 차츰 마무리되어갈 즘이었다.
…!
그 롤러 같은 백지령들이 일제히 긴장하더니, 주위의 구멍으로 쏜살같이 들어가버렸다. 나무 위의 날개 달린 옅은 이들도 깍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리를 떴다. 메어 일행도 일제히 잠에서 깼다.
“뭐야…! 이 기운은…”
메어가 영역을 꺼내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색채귀의 냄새. 고약질 나고, 텁텁했다. 상당히 강렬한 무게도 느껴졌다. 녀석은 벌써 메어의 근처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옅은 이들을 이끌고 고목 밖으로 나와 천천히 출구로 나가기 시작했다.
녀석은 먹잇감을 노려보는 포식자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메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반드시 잡을 수 있다는, 그런 확신이 느껴지는 느긋한 움직임이었다.
그들이 숲을 빠져나가자, 완만한 개활지가 펼쳐졌다. 머리 위로 약간 서늘한 공기가 풍겼다. 한기 밑으로는, 높은 키를 가진 갈대 같은 식물들이 즐비해 있었다. 메어가 풀더미 근처까지 물러났을 때 즈음이었다. 그들을 쫓던 색채귀, 제이 룽이 모습을 보였다. 메어는 식물을 등지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넌 누구야?”
“이 녀석인가. 직접 보니 웃음이 나오는군.”
“뭐가 웃음이 나오지?”
“지시가 내려왔다. 널 잡으라는.”
“그러니까 넌 누구야!”
“이름을 들어봤자다. 넌 여기서 끝난...”
제이 룽이 말을 끝마치기 전, 메어가 오른 다리에 의지색을 감고 그의 코앞까지 달려갔다. 메어가 발차기를 날리기 위한 자세를 취했을 때였다. 제이 룽은, 그 의지색을 감은 다리를 잡아챘다.
“이게 네 능력인가.”
“?!”
제이 룽은 꼼짝없이 번개에 감응되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온몸으로 의지색을 받아들며 메어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붕 떠버린 그녀의 표정은 당황스러움 자체였다. 제이 룽은 가감없이 메어를 바닥에 패대기쳐버렸다.
“큭!”
“더 해봐라.”
제이 룽은 그녀를 낚아채 멀리 던져버렸다. 메어는 간신히 바닥에 착지하며 태세를 정비했다.
“뭐지..? 저 녀석… 그걸 정통으로 버티다니 말도 안 되잖아!”
“생긴대로군. 메어, 평소대로 승부를 겨뤄야겠어.”
“어.”
그녀가 몸을 낮게 숙였다. 오른손이 지면에 닿으며 팔이 지평선과 수직이 되었을 때, 메어가 왼쪽 팔에 의지색을 감고 달리기 시작했다.
메어가 왼손으로 수신호를 주자, 바유가 메어의 뒤로 움직이며 다른 옅은 이들을 난잡하게 퍼뜨렸다. 제이 룽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눈을 굴리고 있었다.
메어가 제이 룽에게 가까워지자, 바유가 그녀의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시선이 돌아간 사이, 메어가 뒤로 보내놓은 옅은 이들을 집합시켰다. 이어 그들이 하나둘 껌딱지처럼 붙어 움직임을 봉쇄했다.
바유가 뒤로 빠져나가자, 메어가 번개에 감응된 왼손을 크게 펴 제이 룽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의지색의 출력을 순간적으로 높였다. 일렉기타 소리와 함께, 그들은 가짓빛의 우레 속에 휩싸였다.
“끝이냐?”
“…무슨…?”
메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마자, 제이 룽의 주먹이 메어의 뺨에 직통했다. 메어는 상당한 충격을 받으며 수풀 쪽으로 날아갔다. 바유와 옅은 이들은 허겁지겁 그녀를 따라갔다.
제이 룽이 천천히 메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넌, 목표가 뭐지?”
갑옷이 절그럭거리며 그의 목소리를 한층 더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메어는 천천히 일어나며 피를 뱉었다.
“…찾아야 할… 도와줘야 할 사람이 있어.”
“시시하군. 원대한 목표는 없나? 기필코 이루고 싶은 숙원은 없나?”
“덩치에 안 어울리게 시끄럽네. 수련을 받아서 강해지고… 그리고 또… 수호자님들에게 인정받고…”
제이 룽이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달려들었다. 옥빛의 영역이 점점 나타나며, 종소리가 퍼졌다. 두 영역이 충돌하며, 땡땡거리고 쟁쟁거리는 괴상한 하모니가 만들어졌다.
그와 그녀의 간격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제이 룽이 메어의 턱밑에서 위로 주먹을 꽂았다.
메어는 회피하지 못하고 전처럼 공중에 떴다.
“주체성도!”
제이 룽은 땅을 박차며 메어의 위로 뛰었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수준의 속도였다.
“확신도!”
그가 오른쪽 다리를 펴 메어를 수직으로 찼다. 짧은 다리에서 나올만한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 경이로운 힘. 메어는 장대비를 맞은 초파리처럼 땅에 처박혔다.
“그 무엇도 없지 않느냐!”
메어가 피를 토했다. 아무래도 내장 중 어디가 파열된 느낌이었다. 잔인하게도, 제이 룽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제이 룽의 말에 틀린 내용은 없었다. 그녀는 흔들리고 있었다. 슬픔에 잠겨 목표와 의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메어를 채찍질함과 동시에 길을 제시했다. 아픔은 힘으로, 절망은 의지로, 외로움은 자립심이 되었다.
메어는 웃음을 지었다.
“고맙네. 너 때문에 생각이 정리됐어. 장단에 맞춰서 다시 한번 말해주지.”
목소리엔 떨림과 고통이 껴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당당한 의지는 목에 힘을 실어주었다.
“자영을 구한다.”
제이 룽이 걸음을 멈췄다.
“수호자가 된다!”
메어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리고 자영을 쫓은 녀석. 티틀이라고 했나? 그 자식도 쓰러뜨려 주지!!!”
그녀의 함성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우연히 바람이 불며 수풀들을, 이리저리 흔들렸다. 마치 그 소리의 음압을 이기지 못한 것처럼.
“…”
제이 룽이 그녀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때, 메어가 손을 흔들며 수신호를 줬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이, 수풀 사이에서 옅은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거기다 메어가 지금까지 써왔던 그 어느 번개보다도, 거대한 양의 영역이 그들에게 감응되어 있었다. 제이 룽을 눈치를 채고 수풀 쪽을 바라봤을 때, 옅은 이들의 중앙에 있던 바유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그 모습은 천둥의 대포알과 같았다.
옅은 이들의 의지색을 받은 바유와 제이 룽이 충돌했다. 제이 룽의 눈은 크게 떠졌고, 팔을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소음은 차마 맨 귀론 들을 수 없었다. 물론 메어 일행들은 그 소리를 경쾌하다고 느낄 뿐이었다.
번개를 받아내던 제이 룽은 점차 주먹을 쥐며 자세를 낮췄다. 그 번개의 광량, 폭음, 출력을 견디기 시작한 것이다. 메어는 긴장하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 했다. 그러나 어영부영 일어난 그녀의 다리가 풀려버렸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옅은 이들을 불러모았다.
번개가 차츰 사라지자, 그을려진 제이 룽의 갑옷이 먼저 보였다. 탄내가 진동하며 옥빛을 띤 연기가 부스스 올라왔다. 바유는 메어를 향해 천천히 복귀했다.
그가 움직였다.
다시, 그는 메어를 향해 걸어왔다. 메어는 입을 꽉 물며 의지색을 쓰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녀는 팔을 후들거리며 마지막 명령을 준비하고 있었다.
“실로 좋은 목표구나.”
제이 룽이 입에서 나오는 피를 뱉으며 말했다. 메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강한 의지색이다. 내장이 좀 타버렸어. 더 섬세하고 날카로워지면 좋겠군.”
메어 일행이 거리를 벌리자, 그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티틀을 쓰러뜨린다고 했지? 해봐라.”
“잠깐…! 너 어딜 가는…”
“내 이름은 제이 룽이다. 잘 살아남아라.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다.”
“무슨…!!!”
제이 룽 영역을 슬그머니 넣으며 걸어갔다. 메어는 몰려오는 고통 탓에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치료가 우선이었다.
“상처가 깊어...”
메어는 수풀 속을 헤치고 밟아 푹신한 간이침대를 만들었다. 옅은 이들과 바유는 그녀의 수발을 들며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메어의 시야가 슬슬 흐려지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한계에 봉착했다. 느리게, 고요하게 정신을 허공에 맡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멀리서 들려오는 흥미로운 소리가 메어의 정신을 바짝 일깨웠다. 무언가가 구르는 소리. 면과 면이 맞닿는, 탁탁거리는 소리.
악기 소리였다. 속이 빈 몸체를 가지고 공명하는 가죽으로 덮인 북. 현란한 손놀림의 연주는 메어의 관심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그 북소리는, 여명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티틀 님, 도착했어요.”
다예람이 잠에 빠진 티틀에게 말했다. 티틀과 열두 색채귀들은 퀴스피드의 능력을 통해 본거지로 복귀하고 있었다. 티틀은 잠에서 깨며 배시시 웃었다.
“흐암, 벌써? 우리 애들도 다 데려왔지?”
“빠짐없이 전부 데려왔습니다. 후발대엔 작전이 취소되었다고 알려놨습니다.”
“잘했어, 예람.”
그 뒤틀린 영역에 여러 개의 구멍이 나타났다. 두 딜러는 구멍에서 빠져나오며 천천히 성당 쪽으로 걸어갔다.
“포폭스.”
티틀의 말이 향한 곳에는 정말 하찮은 크기에 귀만 큰, 옅은 노란빛의 동물 조각상이 있었다. 눈은 세 개였고, 이마의 눈만 열린 채 동공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여우인지 고양이인지, 족제비인지 모르겠는 특이한 형상이었다.
“그동안 망은 잘 보고 있었어?”
“네. 잘 보고 있었지요-”
그의 세 번째 눈에 빛이 들어왔다. 녀석은 기어들어가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끝을 길게 늘여서 말했다.
“그래? 아무도 안 들어왔지?”
티틀이 꽤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하자, 포폭스는 신경이 곤두서며 위축되었다.
“네,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는데-”
“거짓말은 안 하네. 수고해?”
“어…. 네?”
“너희, 위치로 가.”
티틀의 명령이 떨어지자, 구멍에서 빠져나온 부하 색채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당이 있는 공동 전후좌우에 있는 불쾌하게 생긴 나무,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무 근처로 다가가자,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며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무의 몸체에는 특이한 글자가 적혀있었다. 네 그루에 적힌 문장들이 각각 빛을 내자, 성당을 에워싸는 마름모꼴의 선이 바닥에 그려졌다.
그어진 선을 기점으로 영역의 땅이 꺼졌다. 기상천외한 힘으로 움직이는 승강기처럼, 마름모의 대지는 점점 심연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대지가 성당에 도착하자, 성당은 그 대지에 합세하며 함께 땅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빙산의 일각. 얻을 것도, 빼앗길 것도 없는 지상과 성당. 그곳은 빛 좋은 개살구 자체였다.
티틀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진정한 본거지이자 은거지는, 지하 성당 아래에 존재하는 또 다른 공동이라는 것을.
앙상하고 초췌한 나무뿌리들부터, 괴롭게 몸부림치는 형상의 꼬인 줄기들, 기분 나쁘기 그지없는 냄새와 습기가 눈과 피부를 따갑게 했다. 잠시 후 승강기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다가, 파여있던 땅을 메우며 정지했다.
진정한 공동의 모습은 인공적이었다. 외부에서 보면 칼로 반듯하게 썰어놓은 듯한, 기다란 사면체를 닮은 구멍과 같았다. 공동의 내부도 자연물을 제외하면 비정상적으로 깔끔했다.
동쪽 즈음의 벽에 거대한 문이 보였다. 문은 두꺼운 나무 재질의 본체에, 앙상한 기둥으로 장식돼있었다. 빠릿빠릿하게 꼬인 덩굴들이 엉켜 문이 열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티틀은 식충들을 불러 덩굴들을 치우고 문을 밀었다. 고정되어있던 문은 빠드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문과 문 사이에서는 차가운 공기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엄청난 한기가 그들을 덮쳤다. 정말로 추운 것이 아닌,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본능적인 위험 신호와 같았다. 범상치 않은 존재가 그곳에 있음을 대기로부터 알 수 있었다.
“내가 앞장서지. 예람, 가자.”
그들은 심연의 문을 넘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속으로 들어갈수록, 다예람도 그 기운에 짓눌려 손을 떨었다. 티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편하게 걸음을 옮겼다.
“제이는 뭐 하고 있으려나?”
“별거 아닌 임무니까요. 충분히 끝내고도 남았겠죠.”
“이 일만 끝나면 슬슬 다른 친구를 찾아봐야겠어.”
“좋죠.”
대화를 하는 사이, 그들은 심연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그곳은 어둠 그 자체였기에, 무엇이 존재하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촘촘히 박혀있는 말라 비틀어진 나뭇가지, 제멋대로 생긴 발광하는 자갈들이 전부였다. 막장의 윗부분에는 망치로 이리저리 두들겨 팬 것 같은, 검은 석고 같은 것들이 즐비해 있었다.
“임무를 완수했나요?”
그리고, 차가우면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흔들리며 심연을 울렸다. 다시 보니 이리저리 꺾인 양 뿔 같은 것들이 미약한 빛을 내며 이곳저곳을 밝히고 있었다.
그 반딧불을 따라 시선을 굴리자, 소름 돋는 형체가 느릿느릿 모습을 비췄다. 여덟 개의 꺾인 다리. 길고 가늘게, 앙상하게 뻗은 몸과 목.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그 꺾인 양 뿔들이 고름처럼 나 있었다. 그 거구의 머리만 해도 티틀의 키와 엇비슷했다. 누워서 목을 빼고 있었음에도 그 장신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 몸은, 이 영역의 주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비리디언 색을 띠고 있었다.
“의지를 꺾는 자이시여.”
다예람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티틀은 능글거리며 설렁설렁 고개를 까딱였다.
의지를 꺾는 자. 절(折).
암시장의 숨겨진 주인이자 분노의 색채귀.
그녀는 티틀에게 정보 수집, 임무, 색채귀의 거래 등,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이자, 외부와 단절된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 과거에 있었던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그녀는 대량의 영역, 탐지 능력, 의지색을 잃어버렸다.
“실패했습니다.”
“실패?”
티틀은 그런 그녀를 마음대로 갖고 놀고 있었다.
“자영을 추격하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병력이 노출될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제게 무엇을 숨기고 있죠?”
“숨기고 있는 건 없습니다. 더 밀어붙이면 큰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이상 속행하는 것을 멈춰주시길.”
“변함없이 이성적이군요.”
“위험을 감수하고서 그녀를 잡는 건 의미가 없으니까요.”
다예람이 진땀을 흘리며 티틀을 바라봤다. 익숙한 광경이지만, 그의 거짓말을 들으면 항상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티틀은 다예람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네.”
티틀과 다예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의지를 꺾는 자가 그들을 향해 목을 숙이며 말했다.
“자영을 대신해 제 몸을 회복시키기 위한 제물을 가져오세요.”
티틀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예를 들면?”
“저희를 노리고 있는 세력, 수호자는 어떨까요? ”
“…!”
“과거 그들이 저희를 소탕할 때, 두뇌 역할을 한 색채가 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믿겠습니다.”
의지를 꺾는 자가 대화를 마친 뒤, 그들을 물러나게 했다. 티틀과 다예람이 인사를 하고 심연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퍼지며, 잠깐 정적이 흘렀다. 의지를 꺾는 자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누웠다.
“퀴스피드.”
퀴스피드가 그녀의 왼편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자영을 빌미로 병력을 이용해 전쟁을 일으킴. 당신의 존재를 모르는 제이 룽, 미끼 임무를 받음.”
“예상대로군요.”
의지를 꺾는 자가 목을 뻗으며 조용히 웃었다.
“슬슬 그에게 접근해볼까요? 퀴스피드. 이어서 감시해주시길.”
티틀이 문을 천천히 여닫은 뒤 홀가분하게 숨을 쉬었다.
“아~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
티틀은 그녀를 마음대로 갖고 놀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티틀의 뒤를 밟고 있다.
포식이냐, 좌절이냐. 신뢰를 찾아볼 수 없는 간계가,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