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는 며칠 전, 수호자들의 본거지.
어리와 자영의 앞으로 사나운 부취가 달려나와 이 대 일의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녀석은 큰 몸집 탓에 굼떴지만, 거대한 질량의 두 팔에서 가공할 힘을 내뿜으며 둘을 수세에 몰았다. 그들을 찌르는 창, 그의 숨결이자 의지색은 강산성의 갈색 빛 기체로, 닿은 것을 부패시켜 액체로 녹여버린다. 그것을 막는 방패, 어리의 먹물을 다루는 의지색은 접촉한 영역을 흡수할 수 있다.
이따금 그가 큰 숨을 들이쉰 뒤 부패의 입김을 내뱉을 때마다, 어리가 붓을 내저으며 잿빛의 파도를 만들어 그것을 뒤덮었다. 처음에는 숨결이 검은 물을 부패시켜 움직임을 봉하려 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힘을 잃고 흡수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사나운 부취는 그 철옹성을 뚫어보려 거칠게 몰아 붙였지만, 어리의 침착함엔 당해낼 수 없었다. 씰은 녀석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투명한 실을 짜내어. 그의 힘을 뺐고, 자영은 완성된 그림에 하이라이트를 칠하듯 두 수호자의 빈틈으로 들어오는 공격들을 튕겨냈다.
반면 티틀과 다예람은 어떠한 의견 공유 없이 각자의 방식대로 연합을 공략하고 있었다. 백지장이면 모를까, 그들은 수백 개의 철판을 들어야 할 상황에 누구 하나 합을 맞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다예람이 찻물을 날카로운 모양으로 만들어 그들에게 겨누려던 때, 티틀이 그 앞을 가로막아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그녀가 다시 수호자들을 추적하기 위해 방향을 꺾어 자리를 잡았을 땐, 식충 부대가 날아가고 있어 공격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티틀의 공격은 예상치 못한 사나운 부취의 움직임에 막혀 이리저리 와해되어 버렸다. 그들은 딱히 짜증 내는 기색 없이, 알아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어리의 거머리 같은 옅은 이들은 액체처럼 녹았다 고체처럼 굳었다를 반복하며, 씰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사주경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측은 체력이 빠진 듯 기진맥진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아… 슬슬 진이 빠져… 빨리 치즈랑 큐 파인드가…”
“어리, 조금 만 더 힘내자.”
“응. 씰, 순조롭게 되고 있어?”
“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역시 수호자들이야. 큰 상처 없이 이렇게나 오래 버틸 줄은.”
“하…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저 추한 모습을 보세요. 막는 데에만 급급하니…“
“이러면 재미가 없잖아. 너희 꼭 이렇게 나와야겠어?”
티틀이 찡찡거리듯 얘기하자 어리와 자영은 미간을 구기며 경멸스럽게 그를 쳐다봤다.
“어, 다들 왜 그래?“
“주제를 알아. 서로 득 본 게 없는데, 도긴개긴이지.“
“자영, 그러지 말고 제대로 부딪쳐보자.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티틀이 네 팔을 들어 식충을 만들어내던 찰나, 순수한 검은 빛의 액체가 티틀의 앞으로 번져오기 시작했다. 어리가 붓으로 옅은 이들을 통솔하며, 그들의 몸에서 나오는 먹물로 파도를 불리고 있었다.
“뭐야, 지루하다고 그 의지색. 명색이 수호자들의 수장인데.”

발 밑에 먹물이 드리워 검게 물들어가던 때, 티틀은 날개를 퍼덕이며 활공하기 시작했다. 양손에 식충을 두른 그는 쏜살같이 씰에게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보던 자영은 세 개의 날을 가진 회오리 모양의 자수정 표창을 만들어, 그의 날개를 조준하고 재빠르게 내던졌다.
“푸핫, 너무 뻔하잖아.”
그는 공중에서 방향을 급격히 꺾어 표창을 피한 뒤, 뒤에 달린 팔을 이용해 그것을 낚아챘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잡으려고 대기하고 있던 어리의 의지색 덩어리를 향해 투척해, 늘어나고 있던 검은 액체의 머리 부분을 잘랐다.

허나 표창에는 얇은 실이 걸쳐져 있었고, 씰은 그 망에 의지색을 흘려 넣어 티틀의 몸을 어지럽게 구속했다. 마지막 수는 예상하지 못한 듯, 티틀은 당혹하며 먹물 바다로 던져지고 말았다. 검은 자국이 화장지에 물들듯 그의 몸에 점점 퍼지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그의 영역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거머리 옅은 이들은 이에 힘입어, 그를 완전히 제압하고자 입에서 먹물을 내뿜었다.
“티틀 님!!!”
다예람은 놀란 듯 그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검은 액체가 덮쳐오던 순간, 다예람은 숟가락을 바닥에 꽂고 그 위로 올라타서 티틀을 향해 도약했다.
“?!”
“잘 왔어, 예람.“
그런데 뜻밖에도, 자신을 돕기 위해 찾아온 다예람을 발판으로 삼아 검은 웅덩이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머리와 허벅지를 짓밟히며 의지색 덩어리에 고꾸라지며, 거머리들의 검은 침을 대신 맞았다. 다예람은 곧바로 정신을 차린 뒤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지만, 그녀의 전신에 뭍은 먹물이 영역을 빨아들이고 단단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찻물을 조각칼처럼 만든 뒤 굳은 먹물을 털어냈다. 바슬거리며 떨어지는 검은 덩어리들은 광부가 갱에서 고된 노역을 하다 온 모습을 연상케 했다.
“아, 미안. 당황해서 그만.”
“…긴박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다예람이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티틀은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며 그녀의 화를 삭여주었다.
“그런 걸 준비하고 있었어? 진작에 알려주지.“
“알려줄 리가. 패를 보여주며 싸우는 건 멍청한 짓이잖아. 그건 자만이야.“
“어쭈, 날 보라고. 이렇게나 당당한걸. 약한 자의 변명일 뿐이야.”
티틀은 어리의 말을 업신여기곤, 거대한 식충들을 자신의 앞으로 불러모았다. 코뿔소를 닮은 뿔을 달고 있던 벌레들은 차례대로 날개를 펼치며, 어리를 향해 전차처럼 돌격했다. 그는 검은 물로 해바라기처럼 드높은 벽을 세워 그것들이 전진하는 것을 막았다. 벌레들은 흡수되었고, 먹물은 단단히 고체화되었다.
“오호, 그런 원리군…”
티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영과 씰이 있는 방향으로도 식충을 말벌처럼 쏘아 보냈다. 이번에도 그것들은 의지색의 파도 속에 빨려 들어간 뒤 고체화되었다. 다예람은 순간 빈틈을 노려 씰에게 찻물을 쏘려 했지만, 들이받을 기회를 엿보고 있던 사나운 부취에게 앞을 가로막혀버렸다.
“이 녀석이… 저리 비켜!!!”
“꺼져라.”
이전에 쌓인 분노가 폭발한 듯 다예람이 고함쳤지만, 사나운 부취는 이를 무시한 채 자영을 향해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어리가 붓으로 검은 파도를 치게 해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그는 영역을 빼앗기면서도 굉장한 힘으로 하나만을 믿으며 마차처럼 전진했다. 그때, 자영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지금이야, 파인드!”
그의 하복부 쪽으로 큐 파인드가 날아오더니, 두 팔로 엄청난 괴력을 발휘해 역기처럼 들어냈고, 동시에 그녀와 함께 도착한 치즈가 사나운 부취의 정수리에 발길질을 날렸다. 그는 곧바로 다예람이 있는 쪽으로 던져졌다.

“멋대로 나서지 마라니까, 이 멍청한 도마뱀이!”
그녀는 굳게 닫혀있던 두 눈을 사납게 뜨며 소리쳤다. 그 외침을 뚫고, 그는 무거운 소음을 주변에 퍼뜨리며 땅에 나자빠져 버렸다. 하늘 위에선 치즈와 큐 파인드를 데려온 에디와 지미가 활공하고 있었다.
“오셨군요. 치즈씨, 파인드.”
“응. 싸움은 아직 이구나.”
“괜찮아요. 곧 끝날 겁니다. 작전은 간단해요.”
씰이 그들과 얘기를 나누던 사이, 티틀은 다예람과 사나운 부취를 두고 앞으로 걸어나오며 말했다.
“드디어… 수호자들의 총집합… 꿈만 같네.“
티틀이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보았다. 번지르르한 성찬을 보듯 그는 입맛을 다시더니, 이내 어마어마한 수의 벌레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준비됐어요. 어리 씨. “
“응. 이제 후퇴하…”

어리의 말이 끝나기가 채 무섭게, 씰의 가슴팍을 뚫고 날카로운 송곳처럼 생긴 식충의 뿔이 주먹을 내지르듯 솟아났다. 그녀가 그것을 빼내려 안간힘을 쓰자, 티틀은 배시시 웃었다.
“그러니까… 막으려면 제대로 막았어야지.”
그는 양손에 모인 벌레들을 수호자들을 향해 발사하기 시작했다. 어리가 붓을 꽉 쥐고, 자영 역시 무언가를 준비하려 하자, 그들도 배후에 있던 식충들에게 가슴을 뒤쪽부터 꽤 뚫려 버렸다.
사방팔방에 고체화된 검은 먹물 내부로 벌레들을 침투시켜 길을 뚫어 놓고, 그 경로로 급습하는 양동작전이었다.
“굳은 물 말이야. 그 안쪽에 숨겨놨었다고. 끽소리 하나 못 내겠지?”
“씰… 씰!!!”
“파인드!!! 빨리 에디에 타고 따라와! 작전, 알잖아?”
큐 파인드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 무언가 깨달은 듯, 에디와 지미를 불렀다. 그녀는 치즈와 함께 어리와 자영을 안고 쏜살같이 도망쳤고, 어리의 옅은 이들과 먹물은 힘을 잃은 듯 땅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며 모습을 감췄다.
“뭐야, 동료를 버리고 가는 거야? 그 수호자들이?”
티틀이 감탄 아닌 감탄을 하며 씰을 향해 꿀벌만 한 식충들을 천천히 쏘아냈다. 그때, 그녀가 열 손가락을 펼치며 허공을 저었다.
“…털쟁이, 네 최후의 수단이구나?”
씰이 그들의 영역의 지형과 몸을 의지색으로 난잡하게 엮어버렸다. 그들의 사지는 마치 파라오의 관처럼 결박되었고, 그녀는 그들을 더욱 세게 붙잡기 위해 손을 꽉 쥐었다. 그러나 하늘에 떠있던 수많은 벌레떼가 날아와, 그것들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툭, 툭
청록빛의 영역이 점점 옅어져 갔고, 그녀의 발버둥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다예람은 기분이 풀렸는지, 웃으며 실타래를 풀어헤쳤다. 사나운 부취는 몹시 짜증이 난 듯 숨결을 토해내며 그것들을 녹여냈다.
“내가 말했지, 두 녀석 정도는 가뿐히 이긴다고.“
“역시 한계를 가늠할 수 없네요. 티틀 님.”
티틀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씰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축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음, 죽진 않았어. 영역이 느껴지네.”

티틀이 혼잣말을 내뱉으며 그녀의 턱을 잡은 뒤 치켜세우곤,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눈 한쪽은 감겨있었고, 다른 쪽은 초점을 잃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기도 하고, 뿔을 만지고 손가락을 굽혔다가 피며 장난을 쳤다. 굴욕적인 상황에도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좋아, 다예람. 이제 데리고 가자고.”
“네. 본부대로.”
티틀은 그녀의 뿔을 잡은 뒤, 다예람과 사나운 부취 쪽으로 걸어왔다. 그때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나저나… 너무 당황스러운걸.”
“…네, 저도 의심스럽네요. 정말 내버려두고 도망친 걸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네?”
“내가 이렇게 강하다는 게 실감이 안가잖아.”
“…그렇죠.”
그는 잔뜩 바람이 낀 듯 유쾌한 발걸음으로 걸어와 다예람의 손을 잡곤, 사나운 부취에게 향했다.
“부취야.”
“닥쳐라.”
“그래, 태워달라고는 안 할게. 이 친구 좀 꼬리에 묶고 가줄 수 있어?”
“꺼져라.”
“네 활약, 부진했다는 건 잘 알 텐데. 조향사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내 알 바 아니다…”
“목소리가 떨리는군? 다시 말하지만, 그냥 끌고 가기만 하면 돼.”
“…마음대로 해라.”
그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사나운 부취는 어쩔 줄 모르더니, 결국 티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티틀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그의 꼬리를 휘어서 씰을 묶기 시작했다. 다예람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들었던 의심을 지우며 웃음을 지었다.
전투가 벌어진 본거지에서, 동쪽으로 살짝 떨어진 장소. 주위는 열대 지역에서 보일 법한 부채를 닮은 잎을 가진 나무들과 비늘 갑옷을 두른 것 같은 줄기를 가진 풀들이 울창하고 청량하게 채워져 있었다.
“어리, 씰, 녀석들이 갔어.”
“다행이네요. 들키지 않아서… 살짝 조잡했는데…”
“이것보다 더 감쪽같을 수가 없어. 정말 대단해.”
“감사해요.”
자영, 씰 그리고 어리의 말소리. 그러나 씰은 티틀에게 잡혀가고, 둘은 분명 급소에 상처를 입었을 터. 그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잠시 뒤, 치즈와 큐 파인드가 합류했다.
“좋은 작전이야. 큐 파인드도 침착하게 잘했어.”
“깜짝 놀랐다니까! 난 뭔가 잘못된 줄 알았어!”
“두 분 모두 수고하셨어요.”
그들은 또 한 명의 어리와 자영을 안고 있었다. 가슴팍에는 구멍이 나 있었고, 자세히 보자 그들의 상처 안쪽은 청록색의 털실의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손짓 하자, 상처가 나 있는 분신들의 얼굴이 사라지더니, 푸른빛의 굵고 얇은 실 여러 가닥으로 변해 풀리기 시작했다. 국수 면발처럼 헤쳐진 실들은 다시 씰의 손으로 돌아가 자취를 감췄다.
“씰! 씰! 어떻게 한 거야?”
“자세히 말하기엔 너무 복잡하니… 빛의 반사를 이용해, 뒤가 비치는 차폐막을 만들었어요. 그 후에 저와 어리 씨, 자영 씨의 분신을 만들어 전투 도중 바꿔치기를 했죠. 그 틈에 저흰 이곳으로 도망쳤습니다.
그 뒤에 치즈 씨와 파인드가 분신을 데리고 저희에게 복귀한 거예요.”
“흔적이나 영역이나… 고려할 게 한둘이 아닌데, 역시 너야.
“아니에요. 과찬이세요.”
그녀의 말을 들은 모두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치즈의 칭찬에 씰은 과분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얘기가 오가는 사이, 자영이 어리에게 다가와 두 손을 내밀었다.
“갑… 갑자기 뭐야?”
“함께 싸워 이겨냈다는 우정의 표시야. 지난번엔 내 투정 때문에 받지 못했으니까.”

그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을 더듬자, 자영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자영의 두 손을 부여잡았다.
“대장! 자영이랑 사귀어라! 사귀어라!”
“파인드, 어리가 화내는 거 또 보고 싶어?”
“그때 생각이 나는군요. 화영 씨와 자영 씨와…”
그들의 머리맡에서 추억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생각했다. 다시는 허무하게 잃지 않겠다고. 다시는 슬피 엇나가지 않겠다고. 어느새 저녁의 색이 수호자들의 모습을 감추러 다가왔고, 그들은 만담을 나누며 본거지로 돌아갔다.
“사흘하고 다섯 시간인가? 역시 이쪽은 너랑 잘 맞지 않나 보군.“
네 개의 이빨과의 전투로부터 닷새 정도가 흐른 뒤. 메어는 슐리의 도움을 받아 단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의지색을 정밀하게 다루기 위한, 대바늘의 구멍으로 번개를 던져 관통시키는 훈련. 어느 수행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쏟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그동안 2미터를 3미터까지 늘린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비를 넘어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고, 슐리가 예상한 방향과 기대를 넘어선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이 정도면 됐어. 이미 너만의 개성은 완성되어 있으니까. 앞으로 이 부분은 계속해서 보완해봐.”
“고마워요, 슐리씨.”
“왼쪽으로 정렬, 다시 오른쪽으로 정렬.”
그녀들의 뒤편에서는 바유와 옅은 이들이 빠르게 공중을 누비며 대형을 잡고 있었다. 바유가 자신만의 신호를 보내면 그것에 따라 옅은 이들이 효율적인 경로로 움직여 위치를 사수했다. 명령을 하달받아 이차적으로 지령을 내리던 체계를 벗어나 독자적으로도 활동할 수 있도록. 일전 네 개의 이빨과의 싸움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그가 고안한 것이었다.
“너희도 수고했어. 이만하고 오늘은 끝내자고.”
그들은 지상에 있던 막사로 들어갔다. 이제 제1지부의 불타고 어질러진 모습은 없었다. 그간 슐리와 메어는 수시로 그곳에 있던 잔해와 묵은 쓰레기들을 모아, 가루로 만들어 숲에 뿌려주었다. 바유와 옅은 이들은 틈틈이 목재와 수풀을 갖고 엮은 뒤, 연회장을 더 안전하고 안락하게 만들었다. 가끔은 메어가 슐리의 방 앞에 있던 잡동사니를 치웠고, 여러 가지 문서를 정리하고 쓸만한 물건들을 닦아 복도를 깔끔하게 청소했다. 어두침침했던 제1지부의 복도는 환하게 빛났고, 지상도 잿더미를 딛고 정겨운 모습이 되었다.
막사 안은 단출했지만 넓었다. 흙을 빚은 뒤 굳혀서 만들어진 바닥은 그 아래에 불을 땔 수 있어 훈훈했다. 기둥과 지지대들은 굵은 나무에 억센 풀로 고정시켜 튼튼해 보였다. 외벽이자 천막은 얇고 마른 잎으로 된 일 층, 짚단을 넓게 편 뒤 진흙을 바른 이 층에, 털 달린 옅은 이들이 뿌리고 다닌 체모와 이끼로 만들어진 삼 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꼭대기에 솟아있는 대엔 나름 슐리의 지부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짙은 빨간 빛의 단풍들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깃발이 조금씩 휘날렸다.
슐리는 가장 안쪽에 있는 녹색의 가죽 방석 위에 앉았고, 메어와 옅은 이들은 중심에 있는 기둥을 둘러싸 앉았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바유는 막사 입구의 천을 덮은 뒤, 내부 왼편에 있던 아궁이에 건초를 넣은 뒤 태워 바닥을 지졌다.
“함께 한지 거의 한 달이네.“
“벌써요? 시간이 참 빠르네요.“
“네 나날을 생각하면 감각이 무뎌질 만도 하지.”
슐리가 막사의 천막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달아오르는 공기의 기운을 받은 메어 역시 노곤해진 듯 반쯤 누웠다.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 그렇게도 이 몸이 무서웠어?“
“네, 무서웠지만… 그때만 그랬죠.”
“지금은?”
슐리가 장난기가 돈 것인지, 팔을 절반으로 나눠 비틀린 모습을 취했다. 하지만 메어는 꿈쩍도 하지 않고 웃음을 보였다.
“…진심인가 보네.”
“슐리씨는 다정하니까요. 자영처럼요.“
“그래?“
슐리는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놀란 얼굴을 했다. 메어도 그녀의 반응을 예상치 못한 듯 피곤함이 달아난 표정을 했다. 슐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갔다.
“사실 여기에 나 혼자 있는 건, 내 원래 모습 때문이거든. 내게 믿음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어.”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짓인걸요.”
“하지만 어쩌겠어. 악마다, 색채귀다. 다들 구린 속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왜 다들 슐리씨의 원래 모습을 알고 있는 거죠?”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렸지. 뭐, 반은 맞으려나?”
메어가 눈을 조금씩 굴리며 아련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슐리는 무릎에 턱을 괴며 얘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나도 남을 받아들이지 않기 시작했어. 찾아온 부하들은 하나같이 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갔지. 여긴 내 왕국이 되었고, 내 힘을 믿으며 여왕 놀이를 하고 살았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것마저도 싫증이 나기 시작했어. 내 자신감과 존재감은, 곧 외로움이 되었지.”
슐리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일까, 네가 왔을 때… 조금 기뻤어.”
“…?“
“수호자들을 만났을 때의 느낌이랄까.”
“…솔직한 제 모습을 보인 게 다인걸요.”
“너, 말하는 거에 훌륭한 재주가 있네.”
“슐리씨에 비하기 그렇지만, 저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무섭다고…“
“네가? 누군진 몰라도 보는 눈이 없구만.”

솔직하고 수수한 담소가 오가는 동안, 정다운 공기가 위아래로 대류하며 막사 안을 미지근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바유와 옅은 이들은 잠에 들어 바닥에 홀라당 누워있었고, 그녀들의 얘기는 마무리를 향해 갔다.
“…그래. 너라면…”
“네?”
“난 경비대니까, 수호자들과 얘기할 수 있는 수단이 있지. 자영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해볼게. 걔네라면 알지도 모르지.”
“…!!! 슐리씨, 정말 고마워요.”
“천만에, 친구에게 주는 작은 선물일 뿐이야.“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따뜻해진 공기에 나른해진 그녀들은 곤히 잠들었다. 제1지부의 밤은 그렇게 느릿느릿 저물어갔다.

색채 세계 남동부 - 비아의 수중 동굴 ‘가시 갈퀴‘의 끝자락
남쪽은 항상 습하고 비가 내리며, 질척거리는 땅과 깊은 연못, 호수가 즐비해 있다. 남부의 가장 큰 산 ‘비아‘의 지하에는 거대한 구멍이 존재하는데, 다른 지역의 공동과는 다른 점이 있다. 그곳은 물이 대량으로 빠르게 순환하며 땅 밑으로 계속해서 침투하고 있고, 그 수류는 수직으로 가파르고 개미굴과 같이 복잡한 구조의 구멍을 파낸다. 남쪽의 지하에는 그렇게 셀 수도 없이 많은 수중 동굴이 형성되어있다. 그런 환경에 맞춰 독특한 생태계가 만들어졌고, 그렇기에 특이한 백지령과 옅은 이, 색채들이 살아간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깊고 어두운 곳, 톱날이 서 있고 꿀벌침같이 생긴 암석이 빽빽하게 벽을 이룬 ‘가시 갈퀴‘. 어째서인지 이런 곳을 찾아온 이상한 방문객이 있었다.
그 손님은 가시 갈퀴의 허공을 도려내며 그곳의 막장으로 들어왔다. 물로 된 외부와 대비되게, 안쪽은 평범히 걸어 다니고 숨을 쉴 수 있는, 공기층에 둘러싸인 동굴이 있었다. 가시 갈퀴의 끝은 시퍼렇고 어두운 파란 빛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바닥은 일그러진 입과 같은 것에 불쾌한 형태의 가시들이 촘촘히 박혀있었고, 그 안에선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거품을 배출하고 있었다. 천장은 마치 구겨진 거울처럼 기묘한 느낌으로, 주변을 반투명하게 빛내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한 색채가 몸을 웅크린 채 바닥을 이불처럼 덮고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방문객은 그 색채를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안녕! 귀여운 우리 거미 씨!“
초록빛의 드레스에 칼날 같은 머리카락. 바로 광기 서린 칼날이었다. 그녀는 크게 웃음 지으며 누워있던 색채를 깨워 두 볼을 잡아당겼다. 그는 짜증을 내며 눈을 비비더니, 등 쪽에서 관절이 여러 개 달린 팔을 꺼내 공중에 띄웠다. 이리저리 제멋대로 꺾인 모습으로 나타난 그것들은, 일제히 그녀를 향해 뻗어 나가 살기를 표출했다. 물방울 형태의 진한 청색 머리카락과 산호초와 같이 생긴 옷, 온몸에 달린 기포같은 상처가 특징적인 푸른빛의 작은 색채였다.
“누구야.”
“나야 나. 여길 찾아올 사람이 누가 더 있겠어.”
그는 천천히 일어서며 덮고 있던 바닥을 내려놓은 뒤, 광(狂)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잠에서 깬 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선 한숨을 내뱉고 다시 바닥에 누웠다.
“아, 칼누나. 오랜만.”
“나도 반가워!“
흉한 거미발이자 흉(凶). 북부의 광(狂), 서부의 오(惡)와 함께 ‘세 대재앙’이라 불리운다.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살아 움직이는 재난, 그 중 둘이 모였다.
“이상하네. 분명 제대로 휘어놨는데. 어떻게 왔어?“
“갈라버리면서 왔지. 오늘은 좀 어설펐어.“
흉(凶)을 휘감던 살기가 사라지자, 다관절의 팔이 서서히 투명해지며 모습을 감췄다. 그가 왼팔을 바닥으로 향해 옆으로 돌려 눕자 광(狂)은 그의 얼굴이 보이는 자리에 풀썩 앉았다.

“무슨 일이야.”
“이리저리 초록색을 찾고 다녔는데 없었어. 그런데 봤어. 티틀이 재미있는 걸 꾸미고 있었어.”
“뭔데.”
“서로 장난을 치는 것 같아. 많은 초록색이 모일 것 같아. 그래서 나도 갈 거야. 재밌어 보여. 어때, 같이 가볼래?”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흉한 거미발은 몸을 돌리며 바닥을 집어들더니 이불처럼 휘어버리고는 몸 위에 덮었다.
“관심 없어.”
“배 채우기 좋지 않아?“
“지금은 나가기 싫거든.”
그가 완고히 거절하자 광기 서린 칼날은 아쉬운 표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워. 좋은 경험일 텐데. 그럼 나 갈게! 나중에 봐!”
“응, 잘 가.”
그녀가 도려내진 허공을 향해 도약해 동굴에서 빠져나가자, 잠시 뒤 흉(凶)은 그쪽으로 왼손을 뻗더니 공기를 쥐어짜 내듯 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구멍이 난 천장이 구불구불거리며 빛을 이리저리 퍼뜨리더니, 아까와 같이 일그러진 모양새가 되었다. 뚫린 곳에서 졸졸 흐르던 물도 더는 흐르지 않았다.
그날은 유난히 폭풍우가 몰아쳤다. 땅이 빗발을 맞고 쓸려나가는 소리가 동굴을 타고 내려와, 빗물이 모여 파도치는 소리와 합쳐져 울렸다. 그곳은 거대한 회오리의 끄트머리에 휩싸여있었다. 바람은 멈출 줄 모르며 더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