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오버진 22화
- : 할짓많다 HJMT
- 7월 9일
-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8월 16일

색채 세계 북동부 - 어딘가
“슐리 씨가 여기서 왼쪽 위, 이곳이라고 했지?”
“그렇다. 아직 많이 남은 것 같군.”
지도를 따라 반나절을 한없이 걷고 나자, 이색적인 경관이 온풍과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와, 좋은 풍경이네!”
나무인지 풀인지 헷갈리게 하는 거대한 파초들이 태양의 빛을 받기 위해 목을 치켜세우며 이파리를 펼쳐대고 있었고, 노란빛이 섞인 고운 백지의 입자는 하나하나가 구분될 정도로 명료하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발을 뻗을 때마다 자박자박 소리를 나며 설탕 같은 질감이 그려졌다.

초목이 솟아있는 지면에는 손톱처럼 생긴 잎을 꽃처럼 펼친 다육식물, 주먹처럼 두껍고 울퉁불퉁한 몸통에 수많은 싹을 틔운 선인장, 얼룩말처럼 화려한 무늬를 가진 외떡잎식물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 따듯한 느낌의 산들바람에는 화재에서 느낄 수 없었던 포근함과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지금까지 그들이 거닐어온 어디보다도 그곳은 상냥하고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하물며 땅 구멍 속에 있는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거미 같은 붉은빛 옅은 이도 위협적인 모습과 달리 매우 친화적이었다.
“생긴 게 되게 반듯하네.“
“윽, 이게 무슨 향인가.”
그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특이한 식물들을 이리저리 들추고 냄새를 맡았다. 오묘하게 기름진 그 냄새는 속을 울렁이게 하면서도 그윽한 분위기를 풍겨, 주변을 더욱 울창하고 후덥지근한 느낌으로 만들었다.
“바유, 저기.”
“응?”
“이리저리 꼬여있는 나무 보이지? 밑동이 의자처럼 생겼어. 좀 쉬다 가자.“
“좋군.”
메어 일행은 쉬어갈 겸, 잔가지들로 만들어진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덩굴처럼 얽혀있는 그 모습은 등나무를 빼닮아있었다. 한눈에 봐도 거대한 기둥을 중심으로, 무거운 머리부분을 지지하듯 아주 굵은 뿌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메어가 말한 것처럼, 앉거나 누울 수 있는 평상과 같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들은 식당에서 자리를 잡는 것처럼 원형으로 앉은 뒤, 가방을 풀어 그 안에 담겨 있던 간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옅은 이들은 나무에 달린 잎사귀를 꺾은 뒤 고깔처럼 말아 잔을 만들었다. 그동안 바유는 가죽 물통의 꼭지에 감긴 끈을 풀고, 따르기 쉬운 각도로 주둥이를 틀었다.

“매콤하면서 달콤한 향이 나…!“
“오호라.”
첫 입은 메어가 가져갔다. 뿌리 튀김이 파삭파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적절히 공기를 머금은 껍질이 깨지며 바삭거림을 더했고, 그 틈에 계피 향이 올라오며 코를 자극했다. 칙칙한 회갈색을 띠었던 나무뿌리는 화유와 만나 시뻘겋게 물들어, 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으악… 너무 달아…”
“난 괜찮다만.“
과일편 강정은 상상 이상으로 달콤했다. 먼저 표면에 뭍은 엿이 질게 늘어지며, 머금고 있던 설탕 결정을 입안에 퍼뜨렸다. 그러면서 엿을 뚫고 도달한 과육의 표면이 까지며, 속에 있는 즙을 지체없이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엿에 뿌려져 있던 시큼한 가루가 과즙과 어우러지며 강렬한 뒷맛을 내며 천천히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정말 찰져! 난 이게 가장 맘에 드네!“
“독한 풀 냄새가 나는데…“
“짭짤하지 않아?”
“전혀.”
껍질떡은 모든 면에서 독특했다. 이를 가져다 대자, 그 표면이 푹신한 목베개처럼 부드럽게 앞니를 받쳐주며 포실포실한 느낌을 전달했다. 고요하고 저항 없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며 질긴 것이 아닐까 생각되던 찰나에, 처음 깨문 부분이 모래가 꺼지는 것처럼 서서히 뜯겨나가며 완벽한 한 입을 선사했다. 툭툭 끊기지 않고 질겅거리지도 않는, 그야말로 쫀득함의 황금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맛은 떫으면서도 고소했으며, 감칠맛이 넘치면서도 수수했고… 그 뒤로도 수십 종류의 표현을 빌려야 할 정도로 복합적이었다.
“좀 살겠군. 시원하다.”
“깔끔해! 얼음을 넣은 것도 아닌데, 정말 차가워!”
빨간빛의 음료수는 목을 신비로움으로 가득 채웠다. 시큼한 붉은 과일들과 떫은 보랏빛의 과일로 만들어진 청, 그리고 짜릿하고 시원한 송진 향이 나는 물이 섞여, 이루 말할 수 없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너희도 어서 먹어!“
“좋아!”
“잘 먹겠습니다!”
옅은 이들은 가방으로 다가와 봉투를 헤치고 과자를 똑똑 소리가 나게 부러뜨린 뒤, 사이좋게 나눠 먹기 시작했다. 바유는 잔을 돌리며 그들의 목을 축여주었다.
“이거 맛있네, 누가 만든 거야?”
“그거야 슐리씨가…”
“어느 틈에…!!! 메어!!!”
메어의 뒤편에서 웃음 끼가 섞인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자, 바유는 화들짝 놀라며 그녀에게 수신호를 줬다. 그때 목소리의 주인이 왼손으로 메어의 어깨를 짚고, 오른손을 까딱 까딱거렸다.
“잠까-안! 나 색채귀 아냐. 더러운 냄새 안 나잖아?”
싸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옆구리에 손을 얹으며, 눈 밑 살을 치켜세우며 메어 일행을 한명씩 바라봤다. 유난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바유를 보고선 조소를 보이며, 그를 당황하게 하였다.
“그나저나 멍청한 애인줄 알았는데, 꽤 날카롭구나?”
그말대로 메어는 일찍이 검지와 엄지를 펼쳐 총처럼 펼쳐, 그의 왼쪽 어깨를 향해 의지색을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숨겨진 영역은 눈치채지 못했네. 아쉬워!“
“넌 누구야?”
메어가 경계를 풀자 그는 천천히 그들의 앞으로 걸어왔다. 옅고 밝으면서 살짝 탁한 느낌의 노란빛이 도는 옷을 입고, 푸른 풀을 연상케 하는 색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오른쪽 소매는 어깨만 가릴 정도로 짧았지만, 왼쪽은 손목까지 오는 긴 소매였다. 특히 날카로운 눈빛을 한 것 같은 이파리 모양의 동공과, 턱시도를 한 것 같은 괴상한 부츠가 눈에 띄었다.
“살구색의 리코트, 등장합니다!”
두 팔을 높게 들은 리코트의 주변에서 시끄러운 트럼펫 소리가 들려왔다. 시상식에 나온 배우처럼 어깨가 올라간 그와 달리 메어 일행은 두 귀를 막고 눈을 찡그렸다. 금관 악기의 합주가 끝나자, 그는 바로 메어의 옆으로 껴 들어앉은 뒤 재빠르게 강정을 집어들고 먹기 시작했다.
“야… 야!!! 그걸 왜 마음대로 먹어!!!”
“지금부터 우린 친구니까! 내게 주는 우정의 선물이라고 생각해!“
“예의가 없다. 어서 사과하도록.“
“미안함다-“
유치찬란한 일련의 행동과 말투는 그들의 화를 돋우면서도, 기이하게 안심되게 만들었다.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그 친근함은 악당의 행동거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여기는 어쩐 일? 북쪽으로 올라가려는 거야?“
“그건 왜?”
“북쪽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고? 여기랑은 달라. 더 올라가지 않는 게 좋을걸?”
“알고 있어. 거기까지 가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메어가 능청스럽게 반응하자, 그는 방실거리며 얘기를 이어나갔다.
“재밌네. 요즘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어서 말이야. 뒷세계의 부호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대. 녀석한테 앙금이 있는 자들이 이를 악물고 찾고 있다더라?“
“무섭군.“
“그리고 이곳저곳에선 색채귀들의 패악질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넌 그런 걸 왜 알고 있지?“
“싸우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약점을 조사하려고 이것저것 찾다 보니 그렇게 됐네!”
그는 마치 말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우다다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댔다. 바유와 옅은 이들은 그 따분하고 지루한 얘기들을 짧게 대충 때우고 있었다.
“와, 똑똑하네! 다른 것도 얘기해줄 수 있어?”
“물론이지!”
하지만 눈에 불이 켜진 메어의 표정을 보자 그들은 아연실색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시작이다, 생각하며 그들은 묵묵하게 과자와 음료수를 툭툭 마셔댔다. 그녀는 방금까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던 맹수 같은 모습은 벗어던진 채, 참으로 바보같이 신이 난 표정을 지었다.
“궁금한 거 있어? 내가 알고 있는 거라면 뭐든지 말해줄게.”
“아… 정말 많은데…”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봐!”
‘치즈 님과 어리 님이 싸우면 누가 이기지? 자영은 얼마나 강하지? 나도 거기에 발을 내밀 수 있을까?‘
유치찬란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그녀는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자! 그러면…”
몇 분을 고민한 끝에, 주제를 찾은 듯 메어는 입을 열었다. 그때, 재미있는 상상들을 제치고 무거운 의문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입가에 있었던 미소가 물러나며, 약간의 떨떠름함이 드리웠다.
“…티틀에 대해서, 알아?”
“알다마다!“
메어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아무 생각 없이 간식을 까먹던 바유와 옅은 이들도 흥미를 보이며 그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곤충을 닮은 색채귀를 말하는 거지? 팔다리가 여섯 개에, 갈퀴 같은 손발을 갖고 있지.“
“꽤 징그럽겠네…“
“못생겼어. 외모보단 힘에 투자했다고 해야 할까?”
“…강해?“
“당연히! 그 정도 경지까지 올라간 색채는 많지 않지. 사실 걔, 원래 약했어. 그걸 타고난 머리와 언변으로 극복한 거지.“
“그렇게 암시장을 만든 거야?”
“아니, 그 조직은 다른 사람이 만들었어. 단지 주인의 자리를 뺏었을 뿐이지!“
“생각보다도 더 엄청난 녀석이었네.“
“굴지의 강자들 위에 군림하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야. 사방의 악귀 중 하나를 패퇴시켰으니.“
“사방의… 악귀?
“아 미안, 너무 나만 아는 얘기였네. 동서남북에 있는 강한 녀석들의 별명이야.“
“아하!”
리코트는 과장된 표정과 몸짓을 하며 얘기했다. ’아니‘를 말할 땐 두 팔을 십자 모양으로 맞대고, ‘천의 꼬리‘를 말할 때는 무서운 귀신을 묘사하듯 양손으로 무언가를 움켜쥐는 모습을 하는 식이었다. 메어는 물론 바유와 옅은 이들은 그런 생동감 있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집중하고 있었다.
“뭐, 이 정도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전부야. 우연이지만, 그 녀석과도 싸워보고 싶었거든. 어디에 영역이 있는지 알고 있는데, 끝내 약점을 찾지 못해서 포기했지.
“준비가 철저하구나?“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내 힘은 볼품없어. 하지만 계획을 세운다면 얘기가 다르지. 난 그런 싸움을 좋아해.”
“힘? 의지색을 말하는 거야?“
“보여줄까?”
메어가 궁금해하자 그는 씽긋 웃으며 두 팔로 몸을 튕기듯 밀어 평상에서 내려왔다. 그가 오른팔을 위로 들자, 주위로 달짝지근한 향기와 함께 살굿빛의 영역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우와…!“
리코트의 영역은 부드러운 솔로 먼지를 툭툭 털어내듯 자연스럽고 서서히 펼쳐졌다. 억세거나 끈적거리거나, 날카로운 느낌이 없는 깔끔함이 눈에 띄었다. 곧 높은 음의 트럼펫 소리가 주변으로 번져나가며, 싱그러운 향이 나는 과일 같은 것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제멋대로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의 쫙 핀 오른손 위에서 붕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내려온 손바닥 위에는 고속으로 회전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뭐야?”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살구 씨앗!“
“살구…?”
“과일의 이름이야. 내 정체성이기도 하지. 난 살구랑 관련 있는 건 뭐든지 마음대로 다룰 수 있어!“
그가 주먹을 쥔 뒤 동전을 튕기듯 엄지손가락을 재빠르게 놀리자, 씨앗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박혔을 것만 같은 소리와는 다르게 씨앗은 사뿐히 땅을 짚으며 조용히 팽이처럼 돌고 있었다.
“자, 이게 내 의지색이야. 어때?”
“어…“
“정말로 그게 다인가?”
초라한 의지색과 달리 흐뭇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메어 일행은 몇 초간 얼빠져 있었다. 이를 예상했다는 듯, 리코트는 펼쳐놨던 영역에서 굴러다니는 작은 살구 몇 개를 주워 다시 평상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먹을 수도 있지!”
그는 살구 더미를 내려놓은 뒤, 가장 노란빛이 도는 것을 집고선 야무지게 베어 물었다. 아삭함과 물렁물렁함의 중간쯤 되는 소리가 퍼지며, 그는 또 다시 빵긋 웃으며 잘난 척을 하는 듯한 눈매를 했다.
“자, 너희도 먹어.”
입을 우물거리며 음식을 권하는 띨띨한 모습에 그들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특별한 것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하나둘 살구를 집어 들었다. 표면엔 옅은 노란빛에 오묘한 빨간색이 조금씩 보였고, 보드랍고 짧은 털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새콤한 느낌이네!”
“음…”
적당히 달면서도 약간의 신맛이 돌았으며, 속살은 연해 씹고 삼키기 좋았다. 누구든지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평범한 과일이었다.
“정말 끝! 내 모든 걸 보여줬어!“
“어… 편리… 하겠네. 배도 채울 수 있고.”
“이걸로 싸울 수 있다는 건가?”
그들의 의문에 리코트는 밝게 긍정했다. 그럼에도 믿지 못하는 눈빛을 보이자, 그는 도끼눈에 반달 모양 입을 하며 말했다.
“당연하지! 너한테서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나랑 맞붙어 보겠어?“
“그래? 실력 한 번 보여줄까?”
“아, 그 전에… 이름을 듣지 못했네.“
“난 마니악 메어. 가지색이야.”
“오호? 나처럼 흥미로운 색깔이네. 살살 부탁해.“
호승심 넘치는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리코트는 앞장서서 비교적 평지인 등나무의 뒤편으로 걸어갔고, 이윽고 둘은 넓게 간격을 벌렸다. 메어는 오른쪽 다리에서 의지색을 뿜어내며 몸을 숙이는 자세를 취했다.
“번쩍번쩍거리는 게 정말 멋있는걸!”
“각오해. 많이 아프다고.“
메어가 뒤를 가리키는 손짓을 하자, 바유와 옅은 이들이 다가와 날개를 단 것처럼 흩어졌다. 동시에 그녀의 뜀박질과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다.
날카로우면서 곰의 앞발과도 같은 묵직한 발차기가 리코트를 향해 날아왔다. 강한 충돌음과 함께 리코트는 살짝 밀려났고, 메어는 바로 물러나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회전하는 살구 씨앗이 그의 왼팔에 붙어있었다. 그녀의 발차기는 확실하게 들어갔지만, 공중에 떠 있는 탓에 타격을 주진 못했다.
하지만 씨앗은 영역 덩어리 그 자체. 넓은 영역은 좁은 영역을 감싼다. 그녀는 가짓빛의 번개를 씨앗에 감싸놓는 데 성공했다. 메어는 즉각적으로 그에게 다가간 뒤 살구 씨앗을 걷어차 그의 몸에 의지색을 적중시켰다.
“으악, 따가워! 살려줘!!!”
“걱정 마. 약하게 조절했으니까. 좀 더 네 실력을 보여줘!”
번개가 꺼지자, 리코트는 몸 곳곳에 있는 가볍게 그을린 상처를 툭툭 털어냈다. 아픔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웃으며 두 주먹을 꽉 쥐기 시작했다. 경쾌한 트럼펫 소리와 함께 십 센티 정도의 살구 씨앗 십수 개가 하늘에 나타났다. 그것들은 일제히 메어를 쳐다보더니, 살벌한 회전음과 함께 새총탄처럼 날아갔다.

첫 번째 탄환은 빗겨나갔다. 두 번째, 세 번째는 각각 오른쪽 무릎과 가랑이 사이를 지나갔다. 네 번째 총탄은 왼쪽 손목을 할퀴고 지나갔다. 겉으로 보기에도 꽤 큰 상처였지만, 그녀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몸을 놀렸다.
“뭐야… 저번처럼 몸이 가볍지가 않아?”
메어는 온 힘을 다해 탄환을 피부로 느껴가며 피하기 시작했다. 가짓빛 영역이 기타를 조율하는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어떻게든 총탄을 피한 뒤 메어는 그대로 리코트에게 달려나가 무릎차기를 날렸다.
“굉장하네!”
“…어?”
쩌적이며 무언가가 금이 가는 소리에 메어 일행의 이목이 쏠렸다. 살구 씨앗이었다. 대포알 만한 그것은 충격을 모조리 흡수한 뒤 절반으로 갈라져 리코트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그 도마뱀 녀석이랑 비슷한 기술이네.“
“누군진 모르겠다만. 내 거가 더 강하지?”
리코트는 숨 쉴 틈도 없이 씨앗을 소환해 메어의 명치를 노리고 발사했다. 메어는 육감으로 이를 알아채며 회피했고, 사각에서 오는 공격은 손등과 발로 번갈아가며 쳐냈다. 메어가 조금씩 상처를 입는 사이, 그는 아주 작은 살구 씨앗을 메어의 주위에 띄워 회전시켰다. 여진과 본진으로 나뉜 지진처럼 그는 미끼 공격 뒤에서 비장의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콩알만 한 크기의 씨앗들은 길앞잡이처럼 재빨랐다. 메어는 눈치채지 못한 듯, 리코트에게 달려가려 오른쪽 발을 뻗었다. 그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손을 꽉 쥐며, 씨앗의 속도를 늘리려던 순간.
“이건…”
바유가 수신호를 주자 그 중심으로 가지색 번개가 생겨나며, 곧 옅은 이들을 하나씩 이어 거대한 진을 만들었다. 날개처럼 펼쳐져 있던 옅은 이들은 서로 손을 붙잡고 메어의 사방으로 다가왔다.
다가오던 씨앗은 그녀의 의지색을 이기지 못하고 밀려나기 시작했다. 눈에 띄게 느려진 그것들은 결국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잃고, 대기 중에 분해되었다. 두 영역이 충돌하며, 트럼펫과 일렉 기타라는 기묘한 조합의 노래가 하늘로 흩뿌려졌다.
“좋은 판단이었어, 바유!“
메어는 잠깐 무방비해진 리코트에게 도약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대로 왼발에 의지색을 감아 내려찍기를 하려던 그때, 리코트가 두 손을 휘저으며 재빨리 뒷걸음질을 쳤다.
“항복! 비범한 실력이야!“
“엥?”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메어는 허무한 표정을 지으며 땅에 발을 디뎠다. 끓어오르던 그녀의 영역은 김이 빠지듯 팍 식으며 곧바로 모습을 감추었다.
“물론 계속 싸울 수 있지만… 네 약점을 몰라서 말이지. 동등한 승부가 되려면 너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야 해.”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멋있었어. 간단한 능력으로 이렇게 싸울 수 있다니.“
“당연한 말씀을! 세심함이 받쳐준다면 이 정돈 껌이지.“
“세심함… 정밀하게?”
“맞아! 요컨대, 하나의 살구를 네 조각이 아니라 여덟 조각이라 생각하는 거야.“
“오…? 그럴듯한걸.”
대련이 끝나고, 그들은 다시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수호자들은 이름을 날리기 전부터도, 엄청나게 강했다는 거지!“
“원색의 색채라는 게… 그런 의미였구나.”
“하지만 무조건이라는 건 없지. 탁하건, 옅건, 길은 열려있어. 무엇을 택할 것인지는 자기 맘이고.“
의지, 색채, 상징. 대부분은 자영과 슐리에게 들었던 내용이었지만, 그의 생동감 넘치는 설명은 거침없이 들어올 정도로 쉽고 아량이 넓었다.
“내로라하는 영웅들도 목숨을 바칠 각오가 있어야 하지. 그럼에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지만.“
“질투의 색채귀 열댓 마리에 비유되는 이유가 있었군.”
힐끗 얘기를 듣고만 있던 바유는 무료함을 참지 못했는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뜻밖에도 그 역시 리코트와 잘 맞았는지, 높낮이 차가 있는 목소리로 몰입해 말을 주고받았다.
어느덧 저녁색이 하늘에 걸려 어둠이 퍼지기 시작했고, 리코트가 평상에서 내려오며 그들의 담화는 막을 내렸다. 메어가 강정 하나를 권하자, 그는 벙글벙글 웃으며 그것을 집어 올렸다.
“재밌었어! 덕분에 과자도 얻어먹고. 다음번엔 제대로 싸워보자!”
“나도. 나중에 또 만나면 그때도 이야기해줘!“
“잘 가라.”
“참! 메어, 손 모아봐.“
“손?”
메어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자, 리코트는 집게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그러자 작은 살구가 손 위에 하나씩 쌓이기 시작했다.
“심심할 때마다 먹어. 그럼 잘 있어!”
짧았지만 인상적인 만남을 뒤로하고, 그는 볼을 씰룩이며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벌써 밤이 깊어버렸네.”
메어 일행은 곧바로 짐을 싼 뒤, 등나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앉아있던 평상의 반대편으로 돌아가자, 좀 더 높이가 있는 곳에 반듯한 공간이 있었다. 가지가 이리저리 꼬인, 가로세로 2미터 정도의 방과 비스름했다. 그들은 주위의 나뭇잎을 꺾어 수북하게 모은 뒤, 바닥을 푹신하게 만들었다.
바유와 옅은 이들은 먼저 곤히 잠자리에 들었다. 다만 메어는 들뜬 마음 때문인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렇게 설치기를 서너 번 할 즈음, 그동안의 피로가 설렘을 덮고 내려와 그녀를 조용히 잠들게 했다.
…
“시셀린 씨가 말한… 목표물, 느껴지네요.“
그리고 또 누군가가, 숨 막히는 힘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