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오버진 25화
- : 할짓많다 HJMT
- 9월 6일
- 9분 분량

밤의 색 투기장의 하루가 저물었다.
경기가 끝나고 투기장의 무대는 아수라장이 된다. 파헤쳐진 바닥의 모래 구덩이들. 크게 거미줄의 형상을 그리며 사방으로 불규칙하게 갈라진 벽. 그리고 손님들이 숨기고 있는 영역을 미처 감당하지 못하고 움푹 꺼져버린 계단. 원래라면 재건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시셀린의 명령이 떨어진다면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 새로 단장된 듯 깔끔한 상태로 돌아간다.
이 투기장은 코와와의 호위 ‘세이프티 매니저‘들이 이끄는 졸병 ‘퍄크 무리’의 영역이다. 그들은 연어 정도의 크기에 상어같이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갖고 있다. 두 개의 거대한 윗니는 얼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데, 아랫니가 조금 굵은 털처럼 보일 정도였다. 셸 핑크 색으로 칠해진 영역처럼 그들의 몸 역시 뽀얀 분홍빛을 띠고 있다. 메어와 헷지의 경기 그리고 그다음 경기가 끝나고, 암실이 된 무대에 퍄크 무리의 우두머리가 졸개들을 이끌고 영역을 고치기 시작했다. 땅상어인 그들이 영역에서 헤엄치면 자연스럽게 날아간 흙이 뭉치고 굳어 단단해진다.
낮밤의 경계를 깨뜨리는 이 영역의 하늘은 항상 검게 닫혀 있다. 선수들의 오감을 빼앗고 생존 본능을 일깨워 싸움만을 생각하게 하는 감옥인 셈이다. 마니악 메어는 시합이 끝난 뒤, 시셀린의 안내에 따라 처음에 잡혀와 있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분간은 여기서 생활해.”
“감옥에 가둘 줄 알았는데, 의외네.”
“네 눈을 보면 알 수 있거든. 어차피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느끼고 있다고.”
시셀린은 그녀의 말에 대충 대답한 뒤 곧바로 몸을 돌려 경기장 쪽으로 되돌아갔다. 마치 메어의 생각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배짱 있는 모습이었다.
방에 홀로 남게 된 메어는 벽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앉았다. 무릎에 턱을 괸 그녀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 눈을 하며 작고 가쁜 숨소리만을 내고 있었다.
’어라?’
주눅든 채로 눈을 이리저리 옮기던 메어가 고개를 들며 오른편을 쳐다봤다. 익숙하고 반가운 물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널빤지에 짚을 이리저리 엮어서 만든 가방, 호리병 모양의 가죽 물통.
메어는 슬금슬금 네 발로 기어가 가방의 입구를 붙잡고 천천히 안을 보았다. 신기하게도 그 안엔 약간의 간식과 슐리가 준 커다란 바늘, 작은 살구 몇 개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가죽 물통 역시 많이 홀쭉해졌지만, 혼자라면 오랫동안 마실 수 있는 양이 들어차 있었다.
“이상하네…. 이 무거운 걸 같이 가져왔다고?”
메어는 의아해하며 가방 속에 들어있는 나무뿌리 튀김 하나를 꺼내 입안에 넣었다. 와삭와삭 소리를 내며 과자를 까먹던 그때, 그녀의 뒤로 네 개의 손가락을 가진 거대한 손이 다가왔다.
“역시 어중이떠중이는 아닌가 보구나.“
메어는 기습에 날카롭게 반응해 그가 뻗은 손바닥에 오른발바닥을 대고 있었다. 그의 행동에 살기는 없었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던 메어는 다리를 금방 내린 뒤 그를 바라봤다.
꽤 우람한 체격에 붉은색을 풍기는 그는 메어를 내려다볼 정도로 큰 키를 갖고 있었다. 그런 모습과는 대비되게 그의 이목구비는 조목조목 점이 연상되게 작고 소심한 모양이었다. 넓게 펼쳐진 귀에는 위로 휘어진 송곳 같은 상아가 귀걸이처럼 걸려 있었다. 손목에는 심심한 질감의 거대한 갈기가 나 있었고 각 마디와 급소는 단단한 뼈 같은 피질에 감싸져 있었다. 몸을 지탱하는 굵은 통짜 다리와 발은 진흙탕을 밟은 코끼리가 연상되었다.
“잠시 여기서 같이 지내게 되겠군.”
무덤덤한 조, 극저음의 동굴 같은 목소리와 함께 그는 손을 내린 뒤, 메어의 반대편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 너도 잡혀 온 거야?”
“뭐 그렇지.“
그는 점잖게 답하며 팔짱을 꼈다. 팔에 힘이 들어가며 부풀어진 근육은 그의 무뚝뚝한 말투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반가워. 내 이름은 마니악 메어야.“
“팔자 좋군. 이런 상황에서 자기소개라니. 우린 갇혀있고, 언제 싸우고 죽을지 모른단 말이다.”
“…맞는 말이지만…“
“알면 됐다.”
메어가 어물쩍거리며 말하자 그는 그녀의 말을 끊은 뒤, 숨을 크게 들이키고 내쉬었다. 어색하고 미묘한 대기가 흐르며 작은 방 속에는 적막이 드리웠다.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생각에 잠긴 메어의 모습을 본 거한이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엘리르라고 불러라.”
“…응.“
그는 턱에 난 작은 수염을 긁으며 메어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그는 어딘가 위축되어있고 야위어 보였다.
“나는 가지색 색채…“
“부럽군.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니.”
“응?”
“색은 너의 진짜 이름이지. 난 그걸 몰라.”
메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엘리르는 다시 팔짱을 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리석은 엷은 빛의 색채. 미색채라고 부르기도 하지.“
“처음 알았어.”
“너와 싸웠던 놈도 나와 같은 미색채다. 아, 그 녀석은 미색채귀라 불러야 할까.”
“아하…”
메어는 꽤 놀란 듯 눈을 뜨며 다리에 얹고 있던 손으로 무릎을 꽈악 눌렀다. 다시금 정적이 찾아오자, 엘리르는 궁금해진 듯 메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녀석을 살려준 이유가 궁금하군.“
“기회를 준 거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붙잡혀와 싸우게 된 거니까. 날 해쳤다 해도 일말의 여지는 주고 싶었어.“
“그리고 너도, 여기에 잡혀 온 다른 친구들도 모두 구하고 싶어.”
“…넌 마치 수호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 같군.“
엘리르가 코웃음을 치며 그녀에게 말했다. 점잖아 보이던 그는 어느새 꽤 시끄럽게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이 질서 없는 세상에 약육강식을 거스르는 건 그들과 추종자들밖에 없어.”
엘리르는 왼쪽 다리를 바닥에 붙이더니 오른쪽 무릎을 세워 팔을 받힌 뒤 뺨을 기댔다. 주먹 쥔 오른손을 때었다 붙이기를 반복하며, 그는 입을 열었다.
“수호자들의 손에도 한계가 있어. 결국, 낙오되는 자가 생기기 마련이지, 바로 우리처럼.“
“…!”
“그렇게 도움받지 못한 누군가는 수호자들을 원망하게 될 거고, 그건 그들의 죄책감이 되는 거야.”
“…그렇겠네.”
“마음씨는 곱구나. 다만 환상에 빠지진 마라. 그 중압감을 느꼈으면 좋겠군.”
그는 눈을 느리게 꿈뻑이며 메어에게 말했다. 꽤 엄한 말투였지만 메어는 무언가를 느낀 듯 담담히 받아들였다.
“아, 이걸…”
메어가 불현듯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강정 하나를 꺼내 엘리르에게 권했다. 그는 지체 없이 그것을 받아, 거대한 턱을 벌려 한입에 삼켜 넣었다.
“고맙군. 난 먹을 거라면 사족을 못 써서 말이야.”
“아하하, 입이 참 크네. 그걸 한번에 먹다니.”
“한창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먹거리를 즐기곤 했지.“
그들은 어느새 마음을 열고 사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세상을 누볐구나.”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네가 대전쟁에 대해 모르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말 그대로. 두 분노의 색채귀가 주도했다. 그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하지.”
“엄청나네… 아, 그렇지!”
메어가 무언가 떠오른 듯 목소리를 높이며 그에게 말했다.
“여기에 대해서도 알아?”
“…내가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이야.”
“왜? 난 그냥 네가 똑똑하다고 생각해서…”
“그렇다는 건 내가 알면서도 잡혀 온 멍청이가 되는 거지 않나.”
“…아…”
메어는 철판에 머리를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뭐 대충 알고는 있다. 이제 난 멍청이가 되었군.”
“그게 그렇게 되는 거야…?”
“농담이다.”
엘리르는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메어는 바보가 된 듯 짧게 하하거리다 연극에서나 볼법하게 과장된 박수를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부끄러운 가짓빛깔이 올라와 있었다.
“여긴 세계 곳곳을 유랑한다. 그리고 과거 색채귀들을 양성하는 곳이었다지.”
“투기장에 발이라도 달렸나… 근데 뭐? 색채귀를 양성했다고? 대체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른다. 자세한 건 여길 만든 자들이 알겠지.”
그녀는 아연실색하면서도, 의외의 얘기를 듣자 꽤 경탄한 표정으로 ’티틀이구나’라고 작게 읊조렸다.
이후로도, 메어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대여섯 시간을 넘게 잡담을 즐겼다. 왁자지껄, 목청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차츰 서로의 얼굴에 졸린 기운이 올라올 즈음이었다.
“머리를 식힐 때가 된 것 같군. 눈꺼풀이 무거워 보이는구나.”
“그런가? 우리 얼마나 얘기한지도 모르겠네. 목이 아픈 것 같기도 해.“
“눈을 좀 붙여야겠군. 언제 시합에 나갈지도 모르니.”
약하게 빛나는 촛불 아래에서 잠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럼없이 벽에 기대 단잠에 들었다. 언제 어디서 목숨이 위협받을지 모르는 바깥보다도 평화로운 감옥이었다.
“이번에는 이렇게…!!”
다음 날, 메어는 수련용 바늘을 바닥에 박아놓고 거리를 벌린 채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쏘는 작은 의지색 칼날은 제법 손가락만큼 얇아지고 간석기처럼 날이 생긴 모습이었다. 원하는 거리까지 날아가는 건 아직 1미터 정도가 남았지만, 확실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열심히 하는군.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지.”
“꼭 완성해낼 거야.”
수행이 한창일 무렵, 문쪽에서 저벅저벅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의 끝에 서 있던 것은 타키 밤스. 그는 엘리르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따라와, 차례야. 너.”
“…벌써 그렇게 되었군.”
“엘리르…”
그는 작게 미소를 지은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엉덩이에 달라붙은 먼지를 털어내며 타키 밤스를 따라 무대로 나가기 시작했다. 메어의 걱정 어린 투의 말에 그는 단호하면서도 털털하게 말했다.
“난, 아마 돌아오지 못할 거다.”
“그런 말 하지 마…!!!”
“내 상대는 색채일 거다. 네가 헷지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나도 그렇게 되겠지.”
“…”
“이런 싸움터가 아니라도,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이미 알지 않나?“
“…힘내.“
“전에 말했던 그 꿈, 멋지게 이뤄라. 행운을 빌지.”
그렇게 엘리르는 투기장으로 들어갔다. 이따금, 알 수 없는 색채의 영역이 조금씩 느껴졌다. 한 시간, 두 시간 정도가 지나갔다. 파찰음이 들려오던 바깥이 조용해지고, 이리저리 날리던 작은 영역 덩어리들의 곡조는 차츰 증발해 모습을 감췄다.
시간이 지나도 엘리르는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메어는 무릎을 이마에 대고 머리를 푹 숙인 채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이 들어버린 건지, 생각을 놔버린 건지 모르는 느낌이 메어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육감이 ‘시간이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시셀린이 차가운 외마디와 함께 문 밖에서 걸어왔다. 어지간히도 귀찮았나 본지 그녀는 손만을 빼꼼 내민 채 메어에게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으며, 메어는 벽을 짚고서 일어섰다. 정신없이 그녀를 따라갔던 저번과 달리 메어는 통로 곳곳에 비치되어있는 크고 작은 조개껍질, 흘러가던 모양 그대로 굳어버린 촛농 같은 것을 훑어볼 수 있었다. 경기장에서의 여전히 황량한 느낌의 대기는 그녀의 코를 계속해 후벼 팠다.
“준비됐어.”
반대편에서 들려온 타키 밤스의 목소리. 그는 어두운 갈색의 색채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왕왕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아지 같으면서도, 묘하게 걸쭉한 남성미가 있는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짖어대던 그 색채는 두 앞발과 하나의 뒷발, 삼족 보행이라는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었다.
두꺼운 반다이크 브라운의 가죽은 오돌토돌 튀어나온 질감이었고, 타원형의 얼룩이 달마시안처럼 이리저리 흩뿌려져 있었다.
다리서부터 목까지 따라간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머리였다. 위아래로 크게 요동치는 이빨, 앞을 향해있는 한 쌍의 뿔, 전체적으로 각진 두상은 그다지 큰 체구가 아님에도 그의 존재감을 두드러지도록 했다.
“이쪽은 지옥의 조향사의 흉포한 악취. 이쪽은 뭐… 얘야.
“마니악 메어야.”
“알아. 후딱 시작하자고.”
소개를 대충 끝마치고 시셀린은 무대 바깥으로 걸어나가며 중얼댔다.
“여기서 이기면, 미리 경기를 끝낸 녀석과 함께 셋이서 경기를 하게 될 거야. 좋은 기회라-”
시셀린의 말을 끊고 흉포한 악취가 재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발톱에 긁힌 경기장의 모래는 파삭거리는 곡소리를 내며 먼지를 위로 던져댔다.
“아직 시작했다고 안 했잖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했지.”
메어의 외침을 뒤로하고, 흉포한 악취는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그녀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그전 상대와는 비교되지 않는, 매섭고도 묵직함이 느껴지는 박치기였다. 메어는 가까스로 반응해 몸을 순식간에 낮춰 먹물을 뿌리는 오징어처럼, 거대한 리본을 휘두르며 바깥쪽으로 빠져나왔다.
흉포한 악취도 곧장 이를 알아챈 듯, 앞발을 수직으로 강하게 차 제동을 걸었다. 그는 속도를 줄이자마자 빠르게 몸을 틀었고, 며칠을 굶은 이리처럼 미친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와 코 주위로, 옅은 갈색의 연기가 조금씩 보였다. 그 이름에 걸맞게 상당히 불쾌한 느낌의 균류 같은 냄새가 풍겼다.
‘이건…’
메어는 본능적으로 영역을 펼쳤다. 이미 흉포한 악취는 이곳저곳에 동그란 형태의 영역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의 노림수를 파악한 그녀는 그에게서 크게 거리를 벌렸다. 웅장하면서도 불길한 오케스트라 소리가 일렉기타의 소리와 맞부딪히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의지색이야. 근데, 뭐가 숨겨져 있는지 모르겠어.’
흉포한 악취는 숨 고를 틈도 없이 달려들었다.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몇 번이고 버릇처럼 왼손을 뒤로 숨기고 손가락을 움직여댔다. 그럴 때마다 한숨을 쉬는 건 덤이었다.
계속해서 삐걱대는 메어의 빈틈을 녀석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짐승의 눈으로 그녀의 시선이 닿지 못하는 곳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거대한 리본과 끈이 시선을 방해할 때마다 입으로 물어뜯고 할퀴며 그녀의 뒤를 노렸다. 결국, 초록색 가시가 달려있던 두 끈이 너덜너덜해지며 바닥에 뒹굴었다.

그 시각, 무대 바깥쪽 계단에 앉아있던 그의 주인이 혀를 날름거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옳지. 역시 저 아이는 잠재력이 있어. 다른 악취들이랑은 결이 다르다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물론, 입니다.”
“귀여워라.”
또 다른 흉포한 악취가 주인에게 앙탈을 부려댔다. 주인, 지옥의 조향사는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어루어만졌다. 본래라면, 흉포한 악취는 그처럼 비쩍 마르고 한 다리로 서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저 아이도 귀엽지만… 아쉽네, 이번 경기가 끝나면 볼 수 없게 되다니.”

‘만나는 녀석 모두 느낌이 달라…’
그녀는 경험이 적었다. 슐리의 수련 때처럼, 그때그때 닥쳐오는 상황에 따라 직감적으로 적을 타파해가야만 한다.
생각을 끝마친 메어는 본격적으로 그에게 역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가 입을 쏘아내듯 물려 할 때마다, 메어는 과거 네 개의 이빨과 싸웠던 경험을 떠올렸다.
‘우선 이렇게…‘
팔다리 없이 제멋대로 움직였던 구렁이 같으면서도, 저돌적인 면모는 야만인을 생각나게 하였다. 속도로 밀어붙이는 모습은 시궁쥐와 비슷했다. 하지만 협동으로 각자의 장점을 어김없이 발휘하던 그들에 비해선 새 발의 피였다.
그녀는 그가 다가올 때마다 몸에 가지색 번개를 둘러 접근을 차단했다. 영역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천천히 심호흡하듯 의지색을 꺼뜨렸다 키는 것을 반복했다. 경합이 계속되며 흉포한 악취는 그녀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고, 무방비 상태에 놓이는 때를 예상했다.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네. 쟤.”
타키 밤스가 갓을 고쳐잡으며 중얼댔다. 그가 말하는 사이, 수 미터가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선 여러 번의 뜀박질이 일어나고 있었다.
메어의 의지색이 꺼졌다. 흉포한 악취는 기회를 잡았고, 몸을 쭉 뻗어 박치기를 시도했다.
“어라?”
“무슨. 일입니까.”
기세 좋게 달려오던 흉포한 악취가 고꾸라졌다. 이전에 찢어졌던 리본이 팽개쳐져 그의 앞발을 꼬이게 했다. 메어가 투우사처럼 그를 유도한 것이었다. 어지럽게 다리를 묶여버린 흉포한 악취를 향해, 메어는 왼 다리에 의지색을 둘러 그를 바깥방향으로 내차버렸다. 지옥의 조향사는 그 모습을 보고 흥미진진해하기 시작했다.
“쟤, 정말 마음에 들어.”
정신을 차린 흉포한 악취가 숨을 크게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의 왼쪽에 덩어리져 있던 반다이크 브라운의 영역이 콧구멍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곧, 그의 안광이 불그스름한 빛으로 뒤덮였다.
녀석이 전보다 더 맹렬해졌다. 이리가 늑대가 된 듯, 사나운 발놀림이 메어의 온몸을 짓밟을 기세로 변했다. 그가 뿔로 들이받으려 할 때마다 메어는 손톱만큼의 틈으로 뿔을 빗겨 피해 나갔다. 두어 번의 들이받기가 이어진 후, 그는 다시 코를 벌렁이며 다른 영역 덩어리를 먹어 치웠다. 꺼진 재처럼 힘없던 그의 눈은 다시 빠르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번에 그의 의지색을 유추할 수 있었다.
‘회복‘, 아니라면 ’강화‘다. 길게 끈다면 저 멧짐승 같은 녀석의 타고난 체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탈진할 것이다. 최대한 빠르고 깔끔하게 찍어 눌러야 한다.
슐리와의 수련을 떠올린다. 궤적을 겹쳐보고, 온몸으로 느낀다.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자연스럽게 의지색을 몸에 감싼다. 신경이 끄트머리부터 저릿해지도록, 관자놀이가 화해지도록, 생각을 줄이고 감각에 집중한다.
녀석이 땅을 가르는 소리가 느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첨리한 가짓빛이 메어의 몸에서 일더니, 곧 두껍게 뭉치며 단정한 모습으로 정돈되어갔다. 어색했지만, 나름대로 전과 비슷한 가지색 번개가 그녀를 휘감았다.
‘어떻게든 됐어…!‘
그녀의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흉포한 악취는 고개를 숙이고 뿔을 곧게 뻗었다.
승부는 한 방에 판가름이 났다. 흉포한 악취의 뿔은 어느새, 경기장의 벽에 닿아있었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무리한 공격을 시도한 결과였다. 메어는 그를 자유롭게 조련하듯 그의 박치기를 벽으로 유도했고, 그는 완전히 무방비해졌다.

강렬한 섬광과 함께, 메어는 오른쪽 발꿈치로 그의 등을 송곳처럼 찍어눌렀다. 정통으로 발차기를 맞은 그는 고함을 지르며 바닥에 짜부라졌다. 오 초를 셀 필요도 없이, 그는 완전히 기절해버렸다. 몸에서 의지색이 빠져나간 메어는 살짝 지친 모습이었지만, 당당히 허리를 펴고서 몸에 가해진 피로를 그대로 받아냈다.
“너무 좋아…”
지옥의 조향사가 그녀의 경기를 보며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부하의 처지는 전혀 상관없는 듯 보였다. 시셀린이 메어의 승리를 확언하자, 숨 막힐 정도로 조용했던 관람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시셀린이 메어에게 다가가며 껄렁거리는 투로 말했다.
“좋겠어. 이제 결승만 남았네.”
“솔직히, 난 이 싸움에 의문이 들거든.”
“생각할 필요가 있나? 색채귀는 악당이야. 너는 정의의 사도 아니야?“
“볼 일이 있는 건, 티틀의 부하인 너지 쟤가 아니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 나나 저 애나 똑같은데 말이야.”
시셀린이 입을 나불대는 사이 메어는 타키 밤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야, 쟤는 어떻게 하고?”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메어는 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날 따라 독방은 왠지 모르게 따가운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지저분하게 잘려버린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바닥을 보았다.
먹고 남은 간식의 부스러기, 힘없이 늘어진 물통. 손톱 길이만큼 바닥에 박혀 있는 바늘.
그녀는 바늘구멍으로 반대편을 바라봤다. 구멍 사이로 분홍빛의 촛대가 나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불꽃의 춤을 이리저리 눈으로 지켜보다, 생각을 멈춘 듯 꾸벅 졸기 시작했다.
감각이 묘해지고 눈이 부스스 뜨일 무렵,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