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색채 세계. 살아있는 색깔의 세상이야! 의지가 약하면 '옅은 이'가 되지만, 나처럼 의지가 강하면 '색채'가 되지.
난 가지색 색채, 마니악 메어라고 해. 누구보다도 당당하다고 자부할 수 있지! 옛날에 나는 약하고 자존감 없는 옅은 이였어. 하지만 내 친구들과 약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 지키기 위해서, 당당한 의지를 갖게 된 거야.
메어가 달리고 있다. 새하얀 빛의 풀숲을 헤쳐나아간다. 머리 뒤에 달린 거대한 리본이 정신없이 휘날린다. 사나워 보이는 옷은 마치 맹수를 연상케 했다. 메어의 뒤로 가짓빛 옅은 이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거의 다 잡았어..!"
"좀 더 빨리 달려봐라 메어."
"빨리! 더 빨리!"
왁자지껄한 옅은 이 무리의 소리.
메어의 앞엔 조그만 도자기가 있었다. 그런데, 움직이고 있었다. 발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작은 발로 보폭을 아주 넓게, 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진다. 메어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도자기를 따라잡았다. 순간, 메어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이야!"
옅은 이가 소리치자, 메어의 손에서 나던 빛이 찢어지듯 갈라졌다. 메어는 손을 뻗어, 그 가지색의 번개를 채찍과 같이 길게 늘어뜨려 도자기를 향해 휘둘렀다.
번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자기에 꽂혔다. 일순간 섬광이 발했다. 그 끝에 나타난 것은 살짝 그을린 도자기였다. 그것은 몇 발자국을 천천히 옮기다, 정신을 잃고 픽 쓰러졌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 먹음직스러운 과일들이었다.
"됐다. 몇 번 해보니 이젠 쉽네!"
메어가 쏟아진 과일을 움켜쥐며 말했다.
"이런 약한 색채귀를 의지색까지 써가면서 잡다니…"
과일 줍던 옅은 이 무리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덩치가 크고 험악하게 생긴 옅은 이, 바유였다.
"아끼다 못쓰면 어떡해? 어차피 힘이 많이 들지도 않고!"
메어는 웃는 얼굴로 맞받아쳤다.
"그나저나, 좀 멀리 온 거 같다. 누군가의 영역은 아니지만, 주의해야할 것 같다 메어."
"괜찮아! 다시 돌아가면-"
그때였다. 심기가 불편해지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우우우- 우우우-
소리는 미세하지만, 점차 커지고 있었다.
우우우-!!
"이건, 짜증 나는 소리꽃의 소리다."
"그것도 색채귀야?"
"그렇다. 녀석은 피해 보고가 많다. 세계 전체에 분포하면서 생명력도 질기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다른 옅은 이들, 색채를 짜증이 나게 만든다."
바유가 말하던 사이, 메어 일행의 근처의 흙이 들썩거렸다. 짜증나는 소리꽃들이 피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악랄하게 생긴 얼굴, 악마와 같은 뿔. 이파리 둘 끝에 달린 손으로 흙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들은 소리를 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우우우-!!!!
짜증 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이윽고, 메어는 귀를 막으며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이건 좀 위험한데…"
소리가 점점 커진다. 짜증나는 소리는 어느새 엄청난 굉음이 되어 대기를 떨리게 했다.
"메어, 명령을 줘라. 내가 네 귀를 막으마."
"모두 각자 날아가서, 소리꽃에 붙어!"
바유의 말을 들은 메어가 외치자, 옅은 이들이 일제히 날아갔다.
날아간 위치는 소리꽃들이 있는 곳. 옅은 이들은 소리꽃들의 움직임과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울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때, 메어가 귀를 막고 있던 손을 양쪽으로 펼쳤다. 동시에, 바유가 메어의 귀를 막았다.
"좀 조용히 해!!"
메어의 양손에서 아까와 같은 번개가 빛났다. 그러더니 번개가 옅은 이들을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으로 된 줄기가 번쩍였다.
우우우… 키, 키에엑!!!!
옅은 이와 메어의 의지색이 감응한다. 서로를 잇는 빛의 줄기들, 마치 눈꽃과 같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본능에 따라 알고 있었다. '계속 있다간 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짜증나는 소리꽃들은 우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빠르게 땅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메어의 번개가 사라지기도 전, 모두 자취를 감췄다.
"역시 나야! 방금 너희를 진두지휘한 이 카리스마. 아주 당당하고 멋지지 않아?"
"겨우 색채귀 몇 마리 잡았다고 기세등등해지지 마라 메어."
"에이- 그래도 정말 위험했잖아! 그래도 바유, 내 귀를 막아준 건 고마워."
영역으로 돌아온 메어 일행. 아까 얻은 과일을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 하고 있었다.
가짓빛의 무대와 같이 생긴 단출한 영역, 곳곳엔 크고 작은 앰프들과 일렉기타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선 왠지 모를 당당함이 풍기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서 수호자가 되고 싶어! 막내라도 얼마나 좋을까…"
"뒷버러지나 안 시키면 다행이겠군."
"거기서 잡일이면 색채귀를 쫓아내는 게 아닐까? 난 그런 것도 좋아!"
"넌 질투의 색채귀도 만난 적이 없다. 메어, 꿈도 꾸지 마라."
"그냥 망상이지~ 나도 내가 수준이 떨어지는 건 알아."
메어와 바유가 티격태격 대듯 대화한다. 그 사이에선 상당한 정이 느껴졌다.
"색채귀들이 많이 기승을 부린다지? 수호자들도 힘들겠어…"
"흉폭한 악취라는 녀석들이 있다. 최근 따라 더 극성이라고 한다."
"그래?"
"적어도 너만 한 녀석들이 대여섯이 있다. 옅은 이 색채귀들을 데리고 다니며 아수라장을 만든다. 녀석들이 모두 모이면 분노의 색채귀에 준한다 하더군."
"그 정도야? 한 녀석도 벅찬데 여럿이 있다니… 그 앞에선 당당하지 못할 것 같네."
메어와 바유, 옅은 이들의 대회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새벽의 색이 밝아올 때가 되어서야 점차 조용해졌다.
메어의 영역에선 정적만이 흐른다. 옅은 이들이 교대해가며 망을 봤다. 아주 조용히, 잠들듯 말듯.
…!
기척이다.
메어는 느꼈다. 색의 영역에 다른 색채가 들어왔다, 잘못하면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작은 의지였다.
메어가 일어났다. 옅은 이들은 모두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바유를 조용히 깨웠다.
"누군가가 내 영역에 들어온 것 같으니 다녀올게. 여길 지켜줘."
"큰 의지는 아닌가. 알았다."
메어는 의지가 느껴지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메어는 살짝 긴장했다. 색채귀는 아닐까, 싸움이 벌어지지 않을까. 오만 생각과 함께 의지의 실체에 다가갔다. 이윽고, 메어는 마주했다.
바닥에 자주색 수정들이 꽃피어있었다. 어떤 것은 마치 당장 찌를 것만 같이 날카로웠다. 밟지 말라는 듯 가시 장판처럼 깔려있기도 했다. 수정들은 일제히 새벽의 색을 받아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 가히 장관이었다.
"거기, 괜찮아?"
한 색채가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었다. 그 색채는 연보라색 짝짝이 소매의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앞머리와 옆머리는 기품있게 반듯했다. 뒷머리는 아주 길었고, 뿔 같은 것이 머리에 붙어 있었다. 머리와 옷의 끝 부분엔 작은 수정들이 달려 있었다. 아무래도 이 수정들을 만들어낸 색채가 확실해 보였다.
메어는 이름 모를 색채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일어나! 너! 내 영역에서 왜 멋대로 자는 거야. 색채귀가 와서 잡아간다?"
답이 없었다.
메어는 흔드는 걸 멈추고 그 색채를 들어 올렸다. 공주님을 앉은 왕자님 같은 자세였다.
"으… 모양빠져."
메어는 구시렁대며 수정 일대를 빠져나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옅은 이들이 있었던 곳으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바유였다.
"메어! 녀석을 데려오면 어떡하냐. 위험할 수 있다."
"괜찮을 거야. 느껴져. 색채귀는 아니야."
"우리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마라."
"무서우면 저기 가서 자. 난 얘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
"… 알았다."
바유는 자고 있는 일행들을 깨웠다. 비몽사몽한 옅은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느릿느릿 바유를 따라갔다. 메어는 그들을 보내고 이름 모를 색채를 지켜봤다.
무척 예쁘다.
그 색채의 얼굴을 처음 본 메어의 생각이었다. 몇 분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메어도 깜빡 잠이 들었다.
메어가 일어나자, 아침색이 밝아오고 있었다. 때마침 이름 모를 색채도 정신을 차리는 중이었다.
"이제 일어나네. 빨리 일어나."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메어가 말했다.
처음엔 연분홍색, 꽃과 같은 모양의 눈이 보였다. 그다음엔 입이 움직였다. 뭔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 색채귀…!!!"
첫 한마디.
메어의 온몸이 전율했다. 그녀는 곧바로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바로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상당한 크기의 무언가가 그 색채를 주위로 솟아올랐다. 그 수정이었다. 수정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메어는 뒤로 물러나면서 팔을 살짝 베였다. 이윽고, 연보라색 영역이 메어의 영역과 부딪히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색채와 눈이 마주친 찰나, 메어의 다리가 수정에 감싸졌다.
"이… 이게 뭐야!!!"
메어는 옴짝달싹도 못했다.
"대답해. 너, 색채귀?
이름 모를 색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색채귀 아니거든? 널 도와줬다고!!"
"어떻게 믿지?"
"바보야, 색채귀였으면 눈을 영영 못떴겠지!!"
"…"
이름 모를 색채가 손짓했다. 그러자 메어의 다리를 감싸던 수정이 잘게 바스러지며 사라졌다. 색채의 주위에 있던 거대한 수정들도 사라졌다.
"휴, 고마워. 너 참… 화려하네. 목소리도 예쁘고."
"…"
이름 모를 색채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곤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만!!! 내 이름은 마니악 메어야!"
"…?"
"적어도 널 도와준 사람의 이름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
"그래."
그 색채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메어가 제지하며 말했다.
"잠시, 잠시만!!!!"
"… 또 뭔데."
"네 이름도 알려줘!"
"… 자영."
"그래. 자영! 이걸로 넌 빚 두 번 졌다?"
"고마워."
자영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바유와 옅은 이들은 황급히 메어에게 다가왔다.
"방금 영역이 충돌한 것 같은데, 메어."
"아, 자영이 떠났어."
"그 색채의 이름이군."
"녀석이 몹쓸 짓을 좀 했지만 괜찮아. 오해는 풀렸거든."
"근데 그 상처는…"
"너.. 넘어진거야 하하."
요란한 아침색이었다. 메어와 바유는 금방 일상으로 돌아갔다. 가지색 영역이 정오의 색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따사로운 오후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번쩍-
한가롭게 쉬고 있던 메어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누렇게 빛나는 무언가, 아니 무언가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그 모습이 확실해졌다. 둥근 몸. 툭 튀어나온 코. 짧은 네 다리. 게걸스러운 표정의 얼굴. 그들은 저마다 갖가지 번쩍이는 것들로 몸을 꾸미고 있었다. 피부는 황금처럼 약간의 붉은 기운이 도는 누런 빛이었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것을 보니 옅은 이들이다.
"너흰 누군가."
바유의 말에 그들은 답하지 않았다. 꽤 급해 보였다.
"뭐 좀 묻겠다 꿀."
"꿀꿀, 연보라색 긴 옷을 입은, 뿔 달린 녀석을 본 적 있나?"
금색 옅은 이들이 말했다. 아무래도 자영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길 다녀가긴 했는데, 왜?"
"오면서 녀석의 흔적을 봤거든. 거래할 게 있어서 말이야."
"저쪽으로 갔어!"
메어가 자영이 사라진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금색 옅은 이 무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거의 점처럼 보이기 시작할 무렵, 메어는 아차 싶었다.
"설마 자영은 저 녀석들에게 쫓긴 건가?"
"확실한 건 예의가 없다."
"바유, 잠시 다녀올게."
"또? 어제 처음 만났을 텐데, 왜 정을 그리 붙이는 건가 메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메어가 생글생글 웃자, 바유는 골머리를 앓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못말리겠군. 길 잃은 방랑하는 옅은 이들이라던지… 넌 예전부터 그랬지. 최대한 조심해라."
"당연하지!"
자영이 있는 곳으로 걸은 지 몇 시간이 될 무렵이었다. 자색 수정들이 피어있는 들판이 보였다. 메어는 그곳에서 예전과 같은 기운을 느꼈지만, 전과 달리 아주 팔팔하고 방대했다.
메어는 가지고 나온 색의 영역을 최대한 숨겼다. 그리고 걸어갔다. 자영의 영역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