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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오버진 2화


색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간 지 몇 분. 메어는 갖가지 형태의 수정꽃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어쿠스틱 기타 줄을 튕기는 소리는 그 화려함을 수수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저마다 흥미로운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메어에게 집중할 시간은 없었다. 자영이 위험할 수 있다, 절경 따위는 장식이었다.


도착했다.

멀리서 금색 옅은 이들이 보였다. 살이 뒤룩뒤룩 찐 땅딸막한 모습. 꿀꿀대는 소리도 들렸다. 메어는 숨을 죽인 채 점점 그들에게 다가갔다. 메어는 근처에서 커다란 수정에 자리를 잡았다. 몸을 숨기기엔 충분했다.


잠시 기다리자, 자영이 소리없이 걸어왔다. 어찌나 고요했는지 메어의 귀에서 피가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 용건은?"

"잘 알지 않는가? 너의 그 의지색. 우리 골로버 님께서 탐내신다고."

"너의 아름다움. 너의 강함. 색채 님이 맘에 들어 하신다."

"이번에는 어떠한 제물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자영은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 뻗은 손에는 날카로운 결정들이 자라나 있었다.


" 돌아가. 관심 없어."

"꿀꿀, 위협하는 건가? 가소롭다."

"너의 처지는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는데?"


그 순간, 한 옅은 이가 메어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어떻게 내가 있는 걸 알았지?!'


메어는 화들짝 놀랐다. 다른 금색 옅은 이들도 눈을 돌려 메어를 보았다. 그들은 박장대소했다. 자영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운이 느껴져서 봐봤더니 아까 그 녀석이군!"

"영역도 못 숨기는 색채? 하하하!!!"

"우하핫!!! 골로버 님이 좋아하시겠군!!!"


메어가 수정 밖으로 걸어나오며 말했다.


"자영, 다행이네. 무사했구나."

" 허튼짓 하지말고 빨리 돌아가!!! 초짜 주제에!"


메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밖으론 어이없이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수치심을 느꼈다. 하지만 곧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난 간다!"


그때였다.


"어이 너, 우리들이 누군지는 아냐? 세상의 온갖 제물을 가진 자. 얘기는 들어봤겠지?"


눈 한 쪽을 잃은 애꾸눈의 옅은 이가 말했다.


"몰라!"


메어가 아주 상큼하게 말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꾸눈은 이어서 말했다.


"보아하니, 옅은 이를 벗어난지 얼마 안됐구먼!"

"그만하고 가자 신입. 보고는 우리가 올릴테니"


애꾸눈은 다른 옅은 이들의 만류에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동시에, 메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자 그러면 신고식을 해줘야겠지!!!"



짝-


애꾸눈이 메어를 향해 짧은 발을 날리자, 살이 매섭게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메어가 들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메어는 장갑에 대고 피를 닦았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은 놀랐다. 금색 옅은 이 무리는 턱이 떨어지도록 크게 울며 신입을 제지했다.


"정신 나갔나!"

"죽고 싶어 환장했나 신입!!!"


애꾸눈은 다른 금색 옅은 이들에게 끌려나왔다. 그들은 자영과 메어를 뒤로하고 쏜살같이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메어와 자영 사이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깬 것은 자영이었다.


"왜 여기에 온 거야."

"그야 난 누군가를 돕는 게 일상일 걸!"


메어는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내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 녀석들의 눈에 띄면 어떻게 될 줄 알고!!!"


'자영이 유난히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메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자영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때었다.


"빨리 돌아가."


자영은 그 말을 뒤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런 그녀의 두 눈에 들어온 것은, 씁쓸히 웃으며 돌아가는 메어였다.


"기분 나빠"


자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영은 생각에 빠진 얼굴을 했다. 가만히 있는 것으론 마음 한 켠의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잠시 뒤 큰 결정을 내린 듯, 영역을 점점 숨기고 천천히 메어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애꾸눈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금색 옅은 이 무리는 애꾸눈을 끌고 그들의 영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애꾸눈의 멱따는 소리에 지쳤는지, 그 뒤에 있던 옅은 이가 애꾸눈의 볼을 후려쳤다.


"신입. 조용히 해라. 잘못했으면 우리 모두 죽었을 거라고!"

"그렇지만 봤잖아!! 녀석은 내게 맞고도 아무 짓도 하지 못했어!"

"어리석긴, 녀석은 어린 티가 나도 색채야!!!"


옅은 이들의 실랑이가 계속되는 동안, 주변의 풍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금색으로 점점 물들어 가는 풀들. 나무는 토파즈처럼 빛났고, 개울은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히 번쩍였다. 저 멀리서 금으로 된 장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시무시한 크기였다. 장벽은 수많은 벽돌로 되어있었다. 그 자잘한 벽돌 하나하나에 O자 모양으로 장식되어있는 청동.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고급스런 가죽들. 거기다 사이사이를 잇는 이음매들은 모두 녹인 금으로 되어 있었다. 과할 정도로 장식된 이 벽돌들은, 어디 하나 모나지 않고 정갈하게 쌓여 있었다.


옅은 이 무리가 입구에 도착하자, 쇠창살, 아니 백금 창살이 위로 들렸다. 창살이 위로 들리자 내부에서 고급스럽고 우아한 레코드판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뚫고 나아가자, 무척이나 거대한 공동이 펼쳐졌다. 공동 안으론 금괴들이 일사불란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금괴 더미 사이사이로 백금과 페리도트로 장식된 기둥들이 솟아있었다. 남은 공간들은 아름답게 조각된 그리스풍 남여신상들이 메꾸고 있었다. 다만 공동 안은 그리 밝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저 사치스러움도 빛에 의해 대단히 절제되어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대한 공동의 중앙에 다다르자, 금칠한 갑옷을 입은 이들이 보였다. 마치 중세시대 기사처럼 생긴 그들은 절그럭거리며, 일행을 맞이했다. 그들은 갑옷 바깥으로 튀어나온 코를 킁킁댔다. '혼'이라고 불리는 선배 옅은 이들이었다.


"안녕들 하신가. 임무는?"

"자영이 있는 곳까진 도달했지만, 또 거절했다."

"역시나"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혼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와서 보고를 올리게나."


혼들이 앞장서서 공동 안쪽으로 들어가자, 다른 옅은 이들도 그들을 따라갔다. 공동 내부로 혼들의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레코드판 소리와 절그럭 소리가 합쳐지자, 듣고 싶지 않은 야단법석의 노래가 되었다.


혼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공동 안의 또 다른 공동, 금색 색채의 방이었다. 공동의 끝에는 이 영역의 주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골로버였다. 악어같이 생긴 그는 수많은 보석으로 몸을 치장하고 있었다. 대단히 아끼는 사치품 같았다.


그도 그럴게, 발에 낀 발찌엔 먼지 한 톨도 없었고, 목걸이는 이렇게나 빛이 적은 공동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했다. 가관이었던 건 입이었다. 그의 입안은 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순히 사치를 위해 뽑은 것인지, 부상을 당해 때운 것인지는 모른다.



"이번 원정의 결과를 말해라."


골로버가 입을 열었다. 걸걸한 저음이 울려 퍼졌다. 목소리는 넓은 공동에 반향되어 웅웅댔다. 소리가 작아질 무렵, 옅은 이 하나가 말했다.


"이번에도 자영은 요구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그 어떤 제물을 준다 해도 듣지 않는가."

"듣지 않았습니다."

"아쉽군녀석의 도망자 생활도 끝내줄 수 있는데."

"아, 대신"

"대신 재밌는 녀석을 찾았다!!!"


애꾸눈이 옅은 이의 말을 가로채 갔다.


"보랏빛의 새로 태어난 색채! 난 녀석의 얼굴에 주먹도 꽂았다!! 여기 있는 누구도 못한 일이다!!"

"골로버 님에게 격식을 갖춰라!"

"신입!!! 정신 못 차렸나!"

"그 녀석의 기척은 내가 알아차렸다고!"


혼들과 옅은 이들이 예의 없게 구는 애꾸눈을 제압하려 했다. 그때였다.


"계속 얘기해봐라 짝눈. 흥미롭군."


골로버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지자, 공동 내부는 조용해졌다. 애꾸눈이 말을 이어갔다.


"이름은 모르지만, 분명 약한 색채였다. 병력을 조금만 줘. 집단으로 붙어서 체력을 빼고, 내가 녀석의 뒤를 치면"


애꾸눈이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새로운 색채가 돼서, 당신을 보좌하지!!!"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다. 금색 옅은 이들의 표정은 예술이었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이 눈을 땡그랗게 뜨고,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혼들의 얼굴은 투구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머리와 손의 떨림에서 그들의 분노가 느껴졌다.




"하하하하!!!!!"


골로버가 쩌렁쩌렁 웃었다.


"그래! 넌 의지가 확고하군. 좋은 자세야. 그 기세로 녀석을 이기고 각성한다면, 볼만한 색채가 되겠군. 엘도라스!!!"


골로버가 말을 끝내자, 어디선가 높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무지하게 뚱뚱한 새 한 마리가 골로버 위로 날아왔다. 그 새는 왕관과 망토로 자신의 우람한 풍채를 꾸미고 있었다.


"휘유~"

"저 옅은 이가 굳은 의지를 보였다. 정말 좋은 계획이 있더군!!!"

"그런가~ 재밌네! 날 불렀다는 건, 의지색을 말하는 거겠지?"

엘도라스의 높은 목소리와 골로버의 낮은 목소리가 교차하며 들렸다. 골로버가 끄덕이자, 엘도라스는 작은 날개를 펼치며 외쳤다.


"그래, 옅은 이~ 너는 이 힘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 말과 동시에, 애꾸눈의 몸에서 금빛이 나기 시작했다.

"히 힘이 넘쳐흘러!!!"

"너에게 의지색을 줬어~ 네 황금 팔찌는 이제 쭈욱- 늘어난다!"


애꾸눈이 팔찌를 흔들자, 팔찌의 모습이 순식간에 채찍으로 변했다. 몇 번 휘두르고 팔찌로 바꾸고를 반복하더니, 이내 만족한 듯 웃었다.


"여봐라~ 혼들을 제외한 너희들!"

"네!"

"저 녀석을 따라가라~ 반드시 녀석의 말을 듣도록!"

"그, 그렇지만!!!"

"너희도~ 그런 의지를 보였다면 몰라~"

엘도라스의 말을 들은 금색 옅은 이들이 잠잠해졌다. 그들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애꾸눈을 바라봤다.


"그래 너희, 날 따라오라고! 너희 중 가장 활약한 녀석은 내 측근으로 삼아줄 테니까!"


애꾸눈이 웃으며 공동을 빠져나갔다. 금색 옅은 이들은 못마땅해하며 차례차례 공동을 빠져나갔다.


"엘도라스, 어떻게 될 것 같나?"

"몰라~ 일부러 영역을 조금만 줘봤는데, 잘해낼지도? 그런데 이번엔 잡아서 팔아버리진 않는 거야?"

"혼들까지 보내서 녀석을 생포할 수도 있지. 하지만 말이야, 저런 굳은 의지라면, 한 번 배팅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단 말이지."

"그런 시련이 각성의 발판인 건 맞지~"

"뭐, 죽어버리면 꼴통 하나 처리하는 거고."


엘도라스와 골로버가 크게 웃었다. 그 소리는 백금 창살 바깥까지 울려 퍼졌다.







메어는 자신의 영역을 향해 아주 천천히 걸어왔다. 마치 당당한 의지가 다해가는 느낌으로 걷고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 뜨문뜨문 스쳐 지나갔다. 슬픔. 분노. 안쓰러움. 쓸쓸함. 아까 했던 자영의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무슨 의미였을까? 메어가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멈추려던 그때.


"반가워요. 거기는 못 보던 얼굴이네요?"


메어가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푸른빛의 색채가 서 있었다. 털실과 같은 옷, 기다랗게 자란 뿔, 세로 동공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수호자 씰 님?"

"잘 아시네요. 편하게 씰 씨라고 부르세요. 저는 높은 사람이 아니랍니다."


씰은 느긋하고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어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세상을 지키는 수호자들, 그중 한 명이 자신의 앞에 있다. 메어를 붙잡고 있던 복잡한 감정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그 자리는 고양감과 두근거림으로 가득 찼다.


"왜 저 저를 찾아오신 거죠? 혹시..."

"긴장 풀어요. 정기적인 조사를 나왔어요. 그러는 도중에 당신을 만났네요.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마마니악 메어라고 합니다"

"멋진 이름이네요. 혹시 색채가 되신지 얼마 안 되었나요?"


씰이 질문을 이어나갔다. 메어는 질문에 답하기 바빴지만, 최고의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딱딱하고 형식적인 말들이 지나갔다. 언제 색채가 되었는지, 언제 바깥에 나왔는지, 영역은 얼마나 방대한지 등등. 하지만 씰의 목소리와 차분함은 완벽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 단단한 말들도 마치 가벼운 대화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영역 바깥에 계신 거군요."

"네 그래서 지금 돌아가고 있어요."

"만나자마자 딱딱한 말을 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전 씰 씨를 뵌 것만으로도 정말 꿈만 같은 걸요!"

"고마워요.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씰이 접고 있던 날개를 펼쳤다. 씰이 날개를 퍼덕이며 말했다.


"참, 웬만하면 지금은 영역을 모두 끌고 다니세요. 분노의 색채귀 하나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거든요."

"네 네!!"

"언젠가 또 봐요."


씰은 부드럽게 미소 짓고 날아갔다. 날개가 왕복하는 바람의 압력이 점점 멀어져갔다. 그러나 멎어가는 소리와 달리 메어의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수호자들에 대한 동경심이 커진 메어는, 다시 당당한 의지를 불태웠다.







메어가 다시 발을 돌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무언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메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 형체는 눈이 부시게 번쩍이기 시작했다.


애꾸눈, 그리고 금색 옅은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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