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은 일단락되었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구려. 완전히 사라졌소.”
바이젤루스가 자수정 벽 쪽으로 걸어갔다. 벽을 뒤로하고 치즈와 큐 파인드는 옅은 이들에게서 내렸다.
“오랜만이야 바이젤루스.”
“바이! 오랜만!”
“반갑군. 얼굴을 까먹을 뻔했어.”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이 에터와 자영이 걸어왔다. 자영이 벽 쪽을 향해 손짓하자, 거대하게 펼쳐진 자수정벽이 드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긴장이 풀리며 연보라빛 영역이 사라지고, 그녀가 그대로 쓰러질려하자 치즈가 다가와 부축했다.
“…자영도 오랜만이야.”
자영은 반눈을 뜨며 말없이 치즈를 바라보았다. 부스스하게 열린 동공에 반사된 빛은, 그녀의 복합적인 감정을 담아내는 듯 했다. 큐 파인드는 자영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소.”
“그렇군.”
자영은 서서히 입을 열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날, 나를 잃어버린 날.”
“넌 상냥하니까. 앞으로도 네 길을 믿어 의심치 않고 나아가”.
“언니, 왜… 나를 위해서… 왜…?”
“언니는 의지를 꺾는 자에게 죽었지.”
“바이젤루스… 더는... 누군가를 믿지 못하겠어.”
“자영,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 부탁이다.”
“이제… 됐잖아. 난 모두를 위해 헌신했어. 그런데 이럴 수가 있을까? 세상은 날 배신했어.
“미안하다.”
“끝났어. 나에게 이젠 스승도, 친구도, 아무도 없어.”
“쫓기고, 노려지고, 도망치고를 반복했어.”
“어떠한가, 우리 기사단과 함께하겠는가?”
“쫓아라! 놈은 이제 종이로 접은 용에 불과하다!!!”
“내 밑에 들어오거라. 너의 힘, 아름다움, 모든 것을 지켜주마.”
“희망도 없고, 그저 목숨만을 이어가던 어느 날.”
“잠시만!!! 내 이름은 마니악 메어야!”
“적어도 널 도와준 사람의 이름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
“운명 같은 만남이 있었어.”
“함께 이겨내자고! 자영!”
“지금까지 자영은 도망쳐왔어. 하지만, 목적 없는 선택은 없잖아? 도망쳐도 당당할 수 있다는 건 이루고자 하는 게 있다는 거니까.”
“그 아이는, 메어는 내 마음속에서 꺼져가는 삶의 목적을 일깨웠어. 사라진 것만 같았던 내 모습을 말이야. 어째서 난 그 아이에게 빚을 지게 되었을까. 그저 넘어갈 수 있었던 부탁을 들어주게 되었을까.
내가 바라고 있었던 게 아닐까? 수단이 아닌 이해로 이루어진 진실한 관계를. 숙명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개척해나가는 삶을. 그리고 약한 이들을 돕는 내 정의가, 틀리지 않았음을 말이야.”
“답을 줄 순 없다. 너의 판단에 맡기겠다.”
“변함없구려 바이젤루스.”
“미안해 자영 씨. 우린 무엇조차 하지 못했어.”
“괜찮아 큐 파인드. 내가 방향을 잃었을 뿐인걸.”
“응, 씰. 그렇게 됐어. 자영을 데리고 갈게. 바이젤루스랑 에터는? 아, 알았어.”
씰과 교신을 끝낸 치즈가 옅은 이를 모자 안에 넣었다.
“일단 본부로 돌아가면서 얘기하자. 큐 파인드, 자리는 충분하겠지?”
“물론!”
“바이젤루스, 에터. 너희도 오랜만에 오지 않겠어?”
“좋소.”
“그리웠는데 잘 되었군.”
자영은 큐 파인드와 함께 지미에 탑승했다. 치즈는 에디에 타며 말했다.
“이거 자리가 부족하겠는데…”
“괜찮소. 날아가면 되오. 조금 느리겠지만… 이해해 주시오.”
“그럼 실례하겠네, 에터.”
“어… 괜찮은 거 맞아?”
“이래 봬도 용이잖소 치즈. 걸어 다니는 것보다 체력이 덜 든다오.”
도란도란 얘기가 오가는 사이, 준비를 마친 큐 파인드가 출발 명령을 내렸다. 에디와 지미가 앞다투어 실린더를 폭발시켰다. 에터 역시 날갯짓을 하며 그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그들은 일점산의 경치가 웅장히 펼쳐질 정도로 높게 올라왔다. 향하는 곳은 수호자들의 본부가 위치한 곳, 북쪽의 악산 ‘허매’다.
고도와 속도가 안정되자, 옅은 이들을 가로지르는 바람의 함성도 잦아들었다.
“아까는 어영부영 넘어가서 미안. 제대로 사과할게.”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큐 파인드도 너도.”
묘한 회색빛의 하늘은 백색 대지의 경계를 나누고 있었다. 두 색의 틈새에는 작은 구름이 하나둘씩 껴 얼룩을 만들고 있었으니, 점을 수놓은 양털 카펫을 보는 것 같았다. 흰색 빛을 내는 태양이 저 멀리 지평선에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더 해야 할 건 없을 거다. 그 어린 색채의 의지를 끊기지 않게 했지. 앞으로 어딜 향해야 할지는 곧 알 수 있을 거다.”
“…그럴지도.”
자영은 메어와 있었던 나날들을 회상했다. 하나씩 하나씩, 그녀가 주었던 바보 같은 제안. 따듯한 말들. 기억을 되짚을수록 자영의 얼굴은 애틋한 웃음기를 띠었다.
“바이젤루스, 메어는… 메어는 본 적 있어?”
“미안하게도,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 없다. 한 발 늦어버렸어.”
“…꼭 다시 만나고 싶어.”
“그거라면, 씰이 도움 줄 수 있을지도 몰라!”
“…마음이 조금은 놓여.”
그녀의 눈에 아주 잠깐 침울한 기운이 찾아왔지만, 큐 파인드의 말을 듣고 빠르게 사라졌다. 자영의 미소는, 정의와 함께 돌아왔다. 더는 따듯했던 모습을 애써 가리지 않아도 되었다. 예전 메어가 자신의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처럼, 그녀도 변화한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그녀를 쫓는 적이 존재했다. 언니, 화영의 원수인 의지를 꺾는 자. 그리고 암시장의 간판, 거대한 병력을 이끄는 티틀.
절을 타도한다.
그녀는 그렇게 결단했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화영을 위해서. 그 과정에서 딜러들과의 마찰은 불가피할 것이다.
“의지를 꺾는 자를 처단하겠어. 이건 나만의 일이니까, 너희는 다른 색채들이 티틀의 본대에게 피해받는 것을 막아줘.”
“알겠소.”
“동의하겠다.”
“고마워, 이 일로 짐을 놓았으면 좋겠네.”
“그렇지만 자영, 우린 지난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적어도 수호자들은, 너의 곁에 있게 해줘.”
“바란다면 알겠어. 내가 절에게 도달하는 걸 도와줘. 이 일은 내가 직접 끝맺겠어.”
“하지만 자영씨가 위험하면 반드시 달려갈 거야!”
“다들 팔자 좋구려.”
자영은 치즈와 큐 파인드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녀들은 상당히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흩날리는 한기류도 사라지고 미적지근한 대기가 느릿느릿 찾아왔다. 악산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무슨 소리지?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
“메어, 느낄 수 있겠어?”
“일단 색채귀는 아니야…”
메어가 힘겨운 표정을 지었다.
북소리가 점점 다가온다. 둔탁하면서도 청아함. 필히 섬세하고 숙련된 손놀림의 끝에서, 나오는 소리다.
“이리 왔나- 저리 왔나- 누가왔나! 감이 이끄는 곳으로 둥! 둥! 둥! 둥!”
소리의 정체가 모습을 보였다. 인간의 모습을 한 색채와 독특한 형상의 항아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갈색빛의 토속적인 털옷은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고, 특이한 양식의 투구 같은 것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얼굴의 부위를 울퉁불퉁하게 조각하고 벌건 갈색으로 무늬를 새겨 만든 것 같았다. 배 앞으로 메고 있는 세 개의 북은 옷과 투구와 같은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지저분하게 삐죽거리는 장발은 야생미를 풍겼다.
그 색채 옆을 성큼성큼 따라다니는, 다리 달린 항아리에도 얼굴이 조각되어 있었다. 벌에 쏘인 것 마냥 눈 코 입이 탱탱 부은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뱀 한 마리가 항아리를 타고 있었다. 녀석도 머리에 투구를 쓰고 있었다. 고대의 패셔니스타라고 해야 할까, 요란하지만 요란하지 않은 친숙한 느낌의 색채였다.
그는 메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풀숲은 임시방편,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바유에겐 도박과도 같은 선택지밖에 없었다.
협상한다.
바유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그 색채에게 향했다. 그 모습을 본 북을 치는 색채가 북을 치는 것을 멈췄다.
“옅은 이야? 분명 색채랑 색채귀가 느껴졌는데요!”
두둥-
명랑한 남자아이의 목소리. 그는 말을 끝마칠 때마다 채로 북을 쳐 추임새를 넣었다. 잠시 뒤, 바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유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부탁이다. 내 목숨을 버릴지언정, 내 친구만큼은 살려다오. 그녀는 내게 소중한…”
“아냐 아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난 나쁜 녀석이 아니니까!”
“…지금 친구가 위독하다. 치료받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어.”
“이런… 심각한 상황이에요?”
살얼음낀 분위기에 그는 추임새를 그만두었다.
“그렇다. 색채귀와 싸우다가 크게 다쳤다.”
“도와줄게요! 이 근방을 이리저리 돌아봐서 잘 알지요.”
“다행이군…”
“이쪽에 태워요!”
바유가 수풀을 열었다. 그는 몇몇 옅은 이들과 함께 메어를 힘겹게 끌어왔다. 그 모습을 본 북 치는 색채는 발 달린 항아리를 이끌고 그녀에게 왔다.
“…고마워, 이름은…?”
“난 두 두둥! 갈색의 색채야! 너는?”
“마니악 메어… 이쪽은 바유. 가지색이야.”
“가지색? 독특하네요!”
그는 바유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항아리에 태웠다. 나머지 옅은 이들은 풀들을 꺾어와 메어가 편히 기댈 수 있도록 푹신푹신하게 쌓았다.
그들은 두 두둥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풀들이 우거진 곳을 돌자, 서늘한 바람이 살짝씩 불어오는 언덕이 펼쳐졌다. 그곳의 지반은 차갑게 식어 딱딱해진, 진한 회색빛의 흙으로 되어 있었다. 나무들도 조금씩 솟아 있었다. 얇은 몸체에 뾰족한 침 같은 이파리들. 짤동한 잔가지들은 윗둥에 얼기설기 자리잡혀 있었다. 일전에 맞닥뜨린 거대한 숲의 나무와는 정반대였다.
“이 근방을 잘 아는가?”
“잘 알고 말고요. 여긴 일점산의 동쪽! 춥고 건조하지요. 커다란 허허벌판이 펼쳐진 서쪽과는 반대로 숲, 언덕, 작은 산들이 즐비해 있지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니, 정말 고맙다.”
“제 의지인걸요! 한 번 대화를 나누면 친구. 그런 친구에게 도움을 주는 건 당연하지요.”
“그런가…”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갈색의 영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스러운 모습의 움집들이 타악기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가장 가까이 있던 움집으로 메어와 두 두둥 일행이 들어갔다.
내부는 겉모습과 달리 꽤나 멋들어져 있었다. 적토로 다져진 바닥과 중앙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 그 불꽃은 바닥을 따듯하게 달구고 있었다. 그 위에는 군침 도는 냄새가 풍기는 수프가 거대한 솥에 담겨 끓고 있었다. 두 두둥은 북과 채를 한 쪽에 두고 입구의 왼편에 있던 털 침대에 메어를 눕혔다.
“이 아이, 메어라고 했지요? 제가 돌보고 있을게요.”
두 두둥이 솥에 담긴 수프를 거대한 숟가락으로 저으면서 말했다.
“아, 부탁이 있어요!”
“부탁? 무엇이든 하겠다.”
“약초가 필요할 것 같아요. 꽃잎이 다섯 장에 바람개비 모양, 그리고 붉은빛을 도는 키 작은 식물이 있지요. 좀 더 동쪽으로 가다 보면 있을 거예요. 전 여기서 간호하고 있을게요.”
“알았다. 지금 바로 구해오겠다.”
“대신, 조심하셔야 해요. 동쪽은 북쪽 다음으로 위험한 곳이지요.”
바유는 옅은 이들을 이끌고 움집 밖으로 나갔다. 누워있던 메어는 그들을 보며 작게 얘기했다.
“고마워… 다들…”
“외상은 여기 있는 것들로 빠르게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이걸 마셔요. 몸 안의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해줘요.”
두 두둥이 침대 옆에 놓인 도자기 잔에 수프를 담고, 녹색 가루를 뿌려 메어에게 권했다. 그녀는 깔짝깔짝 수프를 마시기 시작했다.
“수프는 가루가 빨리 흡수되는 걸 도와줘요. 약용 버섯과 채소를 끓여서 만들었지요. 녹색 가루는 상추날개라는 옅은 이가 떨어뜨리고 다녀요. 피를 멎게 하고, 상처가 아물도록 해주지요.”
메어의 풀린 눈이 서서히 초점을 되찾아갔다.
“그렇지만 아직 큰 상처들이 남았지요. 그걸 치료하려면 약초가 필요해요. 친구들을 기다리죠. 그때까지 안정을 취해주세요.”
“조금은, 나아진 것 같네. 고마워.”
“Vv_Rh N’sh?”
밖에서 익숙지 않은 소리가, 기묘한 언어가 특이한 목소리로 밖에서 들려왔다.
“아, 들어와!”
입구에서 작디 작은 구체가 둥실 거리며 들어왔다. 몸에 그어진 선에서는 옅은 붉은 빛이 겉돌고 있었다. 그 구체는 작은 겉옷을 입고 하부에서 기묘한 불꽃을 뿜으며 날고 있었다. 얼굴은 쪼개진 사과처럼 생겼고, 유리와 철 같은 것으로 덮여있었다. 일단 생물은 아닌 것 같았다.
“소개할게 메어, 이쪽은 플-뤼니! 독특한 이름이지요?”
“특이하네.”
“나도, 소개해줄래?”
밖에서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플-뤼니의 뒤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저거다. 두 두둥이 말한 약초.”
바유의 작은 손이 약초를 가리켰다. 말한 그대로, 키 작은 바람개비 모양의 붉은 꽃이었다. 수 시간의 탐색 끝에 드디어 도달할 수 있었다.
바유와 옅은 이들이 다가가 그 꽃을 꺾으려는 순간이었다.
!!!
하늘에서 한 옅은 이가 날개를 펄럭이며 하강했다. 부엉이를 닮은 시기의 색채귀였다.
“이런, 전투는 불가피하겠군.”
바유가 옅은 이를 불러모았다. 메어가 각성하기 전처럼, 옅은 이들로만 이루어진 팀. 조금만 엇나가도 소멸할 수 있었던 그때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메어가 하던 것처럼 옅은 이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정면으로 돌파하겠다. 너희는 원형으로 퍼져서 놈을 포위해라. 내가 그곳에 의지색을 감응시키겠다.”
옅은 이들은 끄덕이며 그 색채귀가 내려올 방향에 진을 쳤다.
위로 솟구쳤던 녀석이 다시 아래를 향해 돌진한다. 그들은 녀석의 궤적을 쫓아 진을 옮겼다. 공중에서 날갯짓을 멈추며 이리저리 날뛰는, 그 움직임을 쫓는 건 한계가 있었다. 결국, 옅은 이들은 그를 포위하지 못하고 바유로 곧장 향하는 것을 허용해버렸다.
“걸려들었군.”
바유는 온몸으로 그 색채귀를 받아냈다. 녀석의 부리가 바유의 흉부를 찔렀다. 바유의 부드러운 피부는 치명상이 될 수 있던 공격을 조금이지만 흘려냈다. 바유는 고통을 참으며 그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메어에게서 받은 가지색 번개를 감응시켰다.
염가적인 의지색이었지만, 녀석은 충분한 타격을 입고 도망쳤다. 옅은 이들은 약초를 조심스럽게 파내어 뿌리째로 들고 바유에게 복귀했다. 작전이 다르게 돌아간 것에 옅은 이들이 미안해했다.
“괜찮다. 나도 두 경우의 수를 생각했으니. 그나저나 예전 생각이 나는군. 우린, 아직도 그때처럼 용감한 것 같다. 그리고 메어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느끼게 되는구나.”
바유와 옅은 이들은 약초를 품에 안고 갈색 영역에 도착했다.
“이런… 조금 늦은 것 같은데. 잘 회복하고 있겠지?”
메어가 있는 움집으로 다가가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두둥의 목소리도 함께 들렸다. 그들은 안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집 안에는 둘이 아닌 세 사람, 그리고 플-뤼니가 있었다. 바유 일행은 두 색채밖에 탐지할 수 없었다. 바유가 꽤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가자 두 두둥이 그들을 맞이했다.
“다친 거야? 바유는 이쪽으로 오세요!”
그는 약재들을 달궈 보자기에 싼 약뭉치를 가져왔다.
“메어의 상처를 치료할 때 쓴 거에요. 조금만 기다려요!”
두 두둥이 끓고 있던 수프 옆에서 통을 가져왔다. 통에는 물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약뭉치에 물을 먹여 바유의 상처에 가져다 댔다. 제법 뜨거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살갗이 시원해지며 고통이 가시기 시작했다.
“신기하군.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지?”
“남쪽에는 의학에 정통한 색채들이 많아요. 거기에서 배워왔지요.”
“수고했어 다들, 너희가 날 살렸어.”
메어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유가 치료받는 사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메어에게 다가갔다. 그 존재에게선 이상할 정도로 새하얀 빛이 감돌았다. 플-뤼니처럼 몸 곳곳에 줄들이 그어져 있었고, 그곳에선 백지와 같은 순백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동공은 톱니바퀴로 되어있어 특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머리카락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었고, 머리 옆으로 더듬이 같은 것이 삐져나와 있었다. 몸은 반투명한 유리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중간마다 관절을 이어주는 이음매가 보였다. 그 위엔 오묘한 색상을 띠는 치마가 걸쳐져 있었다.
“두둥, 메어는 나한테 맡겨줄래?”
“알았어! 친구들아, 그 꽃 좀 가져와 줘요!”
두 두둥의 말을 들은 옅은 이들이 약초를 들고 메어에게 다가갔다. 이어 플-뤼니가 그 순백색의 존재의 뒤쪽으로 날아왔다.
“너, 정체가 뭐지? 조금 전에 영역도, 냄새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백색의 존재가 플-뤼니와 함께 바유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 미안. 소개를 안 했네. 내 이름은 하르 디-크루스. 이쪽은 플-뤼니야.”
“하얀 몸, 영역이 없는 존재… 백지령인가?”
“오, 꽤 좋은 추측이었어요. 하지만 땡. 하늘에 해가 떠 있잖아요. 정령들은 햇빛에 아주 약하죠.”
“그럼 도대체…”
“기광종이라고, 들어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