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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오버진 4화



"뭐야, 저건?"


퍼머넌트 그린 색채귀, 리머미. 온몸을 붕대로 감싸고 있는 이상한 모양새. 붕대 사이사이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 피어 올라오고 있었다. 움직임은 문어다리 같았고, 색은 독극물과 같이 밝은 초록색이었다. 액체인지 부글부글 끓는 모양새도 보였다. 그 영역에선 레이저가 으르릉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역의 모습도 그 독특한 액체와 똑 닮아있었다.


"잡는다 자영"


리머미는 불쾌한 목소리를 냈다. 목에 거품이 낀 듯한 느낌의 낮은 소리였다. 이내 매우 재빠르게 자영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영은 미리 펼쳐둔 벽에서 거리를 벌렸다. 벽이 녀석을 막아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리머미의 몸이 순간 빛을 발하더니, 수정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


"저 녀석의 몸은 구름 같은 건가? 수정을 뚫고 오고 있어!"


레이저 소리가 거세지다가, 이내 리머미는 장벽을 뚫고 땅에 발을 디뎠다. 녀석이 몸을 꺾는소리가 들려왔다.


"피해."

"어 어!!!"


리머미가 순식간에 메어를 향해 다가왔다. 본능에 따라 가드를 올린 메어는 리머미의 발차기를 맞고 날아갔다.


"바유, 지금이야!!"


날아가는 도중 메어는 때마침 도착한 바유를 날려보냈다. 그리고 의지색을 감응시켰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가지색 번개가 리머미에게 직격했다. 리머미는 몸을 비틀며 일어났다. 가슴팍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고, 그 사이론 초록빛의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이 손을 갖다 대자 상처가 금방 사라졌다. 그때 뒤에서 자영이 나타나 리머미의 얼굴을 향해 뾰족한 수정들을 날렸다. 하지만 낮은 레이저 소리가 났을 뿐, 수정들은 그대로 몸을 관통해 피해를 주지 못했다. 메어는 여유를 주지 않고, 리머미의 팔을 노려 의지색을 썼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리머미의 몸을 관통해버렸다


"뭐야! 아까는 분명"

"기묘하군. 분명 느낌이 있었다."


바유가 메어의 뒤에 오면서 말했다. 리머미가 자영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다시 한 번 수정벽을 만들었다. 아까와 같은 양상이었다. 리머미는 전과 같이 빛을 내며 벽을 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때 자영이 방향을 돌려서 메어에게로 뛰어오며 한 손에서 수정을 만들었다. 녀석이 알아차리고 벽을 거꾸로 빠져나온 순간. 자영이 색채귀의 얼굴을 노리고 수정을 던졌다.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리머미의 얼굴이 날아갔다. 하지만 기척은 그대로였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리머미는 다시 일어섰다. 얼굴이 있던 곳에선 그 이상한 액체가 흘렀다. 순간 그 액체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녀석이 아까처럼 팔을 갖다 대자, 부서져 있던 얼굴이 점점 재생되기 시작했다. 메어와 자영은 리머미의 비밀에 조금 더 다가가기 시작했다.


"의지색을 쓰면 잠시 실체화되는 것 같은데."


자영의 말을 듣고 메어가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가!"


메어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자영이 리머미에게 달려갔다.


"잠깐! 서로 합을 맞추는 게"


아무래도 무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메어는 솔직히 화가 났다. 자신의 실력이 못나 이런 취급을 받는가, 생각하고 있었다.


자영은 수정 손톱을 새우더니 그대로 도약했다. 곧이어, 리머미의 왼쪽 팔을 향해 팔을 휘둘렀지만, 그녀의 몸이 통째로 통과되어버렸다. 어깨, 몸통, 다리 순서대로 천천히, 그리고 발끝이 빠져나오던 그 찰나. 자영은 자신의 다리에 거대한 수정을 둘러 녀석의 왼팔을 완벽히 부숴버렸다.


"멍 때리지 말고 어서 공격해!"


메어가 감탄하고 있을 때 자영이 소리쳤다. 잠깐의 방심으로 메어는 주도권을 리머미에게 주고 말았다. 리머미가 팔을 재생하면서 메어에게 달려왔다. 그러곤 몸 전체를 비틀어 원을 그리고도 남을 수준으로 회전하며 메어에게 강타를 날렸다. 메어는 정통으로 맞고 하늘로 솟구쳤다.


그때,



"양팔에 붙어!"


메어가 외치자, 리머미의 양쪽 팔은 옅은 이들로 구속되었다. 그들을 쫓으려 해도, 팔은 점점 가지색으로 물들어갈 뿐이었다. 메어는 옅은 이들을 서로 다른 위치에 짝을 지어서 두고 있었다. 어디에 있어도 옅은 이들이 빠르게 달려올 수 있게 진을 쳐놓고 있던 것이다. 메어가 힘을 다해 강렬한 의지색을 감응시켰다. 일렉기타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리머미의 양팔이 깔끔히 날아갔다. 더 회복할 수단이 없던 그는 자신의 붕대를 풀어헤쳤다.


순간 당황한 자영은 방어 태세에 들어갔지만, 이는 녀석의 함정. 실체는 그의 몸에서 흐르고 있던 부글부글 끓는 액체였다. 리머미의 본체가 공과 같은 형상으로 뭉치더니, 그들의 시야에서 혜성과 같이 사라졌다. 메어가 아슬아슬하게 착지하며 말했다.


"휴 방금은 정말 좋은 임기응변이었어! 그렇지 자영?"


자영은 놀란 표정으로 메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짐짝일 것만 같았던 메어의 힘은,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고 있었다. 하지만 자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지 말라고! 너도 놀랐잖아, 표정에 다 보이는걸?"


메어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기분 나빠."

"너, 계속 그런 태도일 거냐."


바유가 자영을 향해 날카롭게 말했다. 하지만 자영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기운이 도는 메어 일행은, 이제 막 본격적인 여정에 오른다.







"왔는가."

"자네가~ 페라우스군!"


공동 속의 레코드판 소리를 뚫고 울리는 골로버와 엘도라스의 인사. 그 인사 앞엔 악마의 얼굴을 한 색채귀가 있었다. 튀고 눈 아픈 핑크색 계열의 영역과 몸. 기괴하게도, 얼굴과 턱이 위아래로 분리되어 둥둥 떠 있었다. 뾰족뾰족한 윗니와 아랫니, 뿔은 양쪽에 하나씩 나 있었다. 그런 형상 주위를 마치 보호하는 것처럼 핑크빛의 불꽃이 감싸고 있었다. 영역은 아까의 그 화염들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주술을 부리는 듯한 느낌의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다. 내가 페라우스. 티틀이 불러서 오게 되었다. 용건은?"

"역시 제대로 된 녀석이라 그런지 보통 배짱이 아니군? 간단하다. 우리가 추격하고 있는 두 색채를 잡고 싶다."

"두 색채라. 얼마나 강하지?"


"녀석들은 함께 움직이고 있다. 한 녀석은 초짜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되었다. 그리고 한 녀석은 네가 들어봤을 수도 있다. 바로 자영."

"자영! 얘기는 많이 들었다. 아름답고 강한 색채. 한 때 수호자들도 눈독 들였다는 인재지."

"잘 아는군~  혹시 더 아는 정보가 있나!"


페라우스가 잠시 말을 머뭇거리다가, 이내 웃음기를 띠며 이어나갔다.


"흐흐 녀석은 약해졌거든. 그래서 자신의 전력을 보강하려고 다른 색채와 같이 다니는 것 같군?"


"그렇다면?"

"간단하다. 둘을 때어놓고, 자영을 지치게 해 더 약하게 만들면 된다. 그 뒤, 너의 옅은 이들로 급습해도 좋겠지."


골로버가 미소 짓기 시작했다.


"자영의 의지색은 나에게 별 피해를 주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 실체가 있는 것은 대부분 막히니까. 그 보석, 마법 같아 보여도 엄연히 녀석의 의지로 만들어진 물건이다."

"호오 흥미롭군. 그런 정보들은 어디서 난 거지?"

"난 원래 정보 수집이 취미다. 다들 영역의 싸움, 의지의 싸움을 말하지만, 난 정보의 싸움이 진정한 능력이라고 생각하거든."


엘도라스가 날개를 부딪히며 말했다.


"그럼 그럼~ 너의 말은 굉장히 뼈 있게 들리는군. 우리와 죽이 잘 맞겠어?"

"동감이다. 너희가 나의 두 번째 파트너겠군."

"아주 맘에 들어. 좋다 페라우스. 당장 계획을 시작하자고."


엘도라스의 말에 대답한 페라우스에게, 골로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페라우스는 미소로 화답했다. 미소는 같은 뜻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는 뭐하는 곳이지?"


메어의 말이 향한 곳에는 백색으로 칠해진 막집 여러 개가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마을'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 적합할 것 같은, 옅은 이들이 무리지어 사는 곳이었다. 의지가 약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이들이 메어와 자영 앞에 나타났다. 간단한 도형같이 생긴 몸을 가진 그들은 메어 일행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색채다!"

"너희, 이름은 있어?"

"없어. 있어도 금방 까먹는걸."


메어와의 대화에 관심이 생긴 바유와 옅은 이들이 다가왔다. 그렇게 다가온 바유와 옅은 이들 그리고 마을의 옅은 이들 간의 긴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가, 메어. 마치 과거의 우리와 비슷하다."

"어떤 느낌인지 잘 알지! 기껏 지은 이름도 까먹고, 무슨 의지로 살아갈지도 몰랐던 그때."


메어가 추억에 잠긴 느낌으로 말했다.


"잠시 여기에 머물 수 있을까?"


자영이 마을의 옅은 이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고민 없이 승낙했다. 색채가 있다면 의지의 방향을 잡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보호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쫓기고 있잖아

“내가 책임질게. 내 영역이라면 약한 의지도 멀리서 알 수 있으니까.”




그렇게 메어 일행은 이 이름 모를 마을에 잠시 정착하게 되었다. 자영은 저번의 가르침에 이어서 메어의 수련을 도왔다.


"손끝으로만 의지색을 써봐."

"이 정도는 그냥 정전기 수준 같은데"

"많은 양을 한 번에 방출하지 마. 최대한 적은 양으로 높은 효율을 내야 하니까."


자영은 그 말을 한 뒤 손을 메어의 반대방향으로 뻗었다. 그러자, 기타줄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수정 가시들이 순식간에 자라났다.


"효율이 높아지면 지속력이 좋아져. 그러면 같은 색의 영역을 갖고도 의지색을 더 많이 쓸 수 있지."


메어가 자영과 똑같은 자세로 손을 뻗었지만, 아주 약한 전기가 치직대다가 말고 사라졌다. 자영은 그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하라고 말했다. 출력이 높은 의지색들은 고유의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메어는 손바닥만큼의 영역을 이용해, 강력한 소리가 들릴 정도를 목표로 삼았다. 한 시간, 두 시간, 메어는 자영이 보지 않는 때에도, 수없이 자세를 반복했다.


하루 이틀이 흘러, 소리가 점점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메어는 아주 잠깐 편법이 없을까, 생각했지만 곧 쓸데없다는 것을 깨닫고 더 수련에 집중했다.




며칠이 흘렀다.


메어의 의지색은 이제 정전기 수준을 벗어나, 나름 구색을 갖춘 모양새가 되었다. 무엇보다 별로 지치지 않았다. 시간을 투자할수록 효율은 올라갔고, 그렇기에 더 많은 시간을 연습에 할애할 수 있었다. 이 모습을 어서 자영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 바유와 옅은 이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바유! 나 드디어 이 정도까지 할 수 있-"

"메어, 자영이 색채귀랑 대치 중이다."

"뭐? 잘 느껴지지 않는데어디야!"



"너는?"

"나는 페라우스. 오페라의 거대한 입."


자영은 페라우스와 대면해 얘기하고 있었다. 자영은 일찌감치 그 미약한 의지를 감지하고 그를 막아섰다. 색채귀. 잘못하면 옅은 이들이 그의 의지에 휩쓸려 악한 마음을 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페라우스의 태도는 싸움하러 온 것이라기엔 여유로웠다.


"싸우러 온 건 아니다. 그건 힘만 낭비할 뿐이지. 내 얘기를 들어보겠나?"

"말해봐"

"간단하다. 난 금색 색채 녀석의 사주를 받고 여기에 왔다. 하지만 지금 너희를 이길 힘은 나에게 없다. 금색 색채의 정보를 주겠다."

"무슨 꿍꿍이지?"


"원래는 너희의 전력을 분산시켜 약화시킨 뒤에 싸우려 했다. 근데,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싶거든. 난 패배한 척 잠적을 할 것이다. 너흰 그저 하던 일만 하면 된다."

"좋은 제안이야."


자영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답을 내놓았다. 그녀로서 페라우스의 제의를 받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곧이어 페라우스는 골로버와 엘도라스의 위치, 의지의 느낌, 그리고 의지색에 대한 정보를 말했다.


"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넌 나를 이긴 것이다."


페라우스는 그 말을 끝으로 자영의 앞에서 사라졌다. 믿을만할까, 자영은 생각에 잠겼다.


"자영! 무슨 일이야!"


메어와 바유 일행이 멀리서 뛰어오면서 말했다.


"색채귀 하나가 있었어 녀석은"


자영은 말끝을 흐리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녀석은, 내가 쫓아냈어."

"다행이네. 강한 녀석은 아니었구나?"

"어."


"그나저나 이거 봐봐!! 나 이제 이렇게 의지색을 쓸 수도 있어! 열심히 연습했다니까!!"

“일단 우리, 이 마을을 떠나자. 색채귀 녀석이 온 걸 보면 안전하지 않아.”

“아 알았어!”


자영은 페라우스에게 의미심장한 느낌을 받았지만, 곧 그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색채 세계 북부- 수호자들의 본거지


"어서 와 씰!"


양홍색의 안드로이드와 같이 생긴 한 색채가 씰에게 안겼다. 신호등 같은 같은 전구가 몸에 박혀있었고, 머리카락을 표현한 것 같은 기계 섬유는 다섯 가닥으로 나뉘어 있었다. 수호자들의 막내인 큐 파인드였다.


"파인드, 외롭지 않았나요?"

"금방 다녀와서 괜찮아!"


씰은 큐 파인드를 안으면서 말했다.


"치즈는 아직 안 왔어."


수호자들의 리더인 어리. 회색에서 검정빛이 도는 왕관을 쓰고 있었다. 옷은 퍽퍽한 느낌의 재질로 되어있었고,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하지만 긴급하게 회의를 해야 할 것 같아. 심상치 않거든."


씰이 어리의 말을 듣고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심각한가요? 티틀의 암시장"

"씰! 씰! 티틀도 우리처럼 강해?"


어리가 큐 파인드에게 주의하라 경고했다.


"상상 이상으로 그 규모가 커. 전에 치즈가 알아온 정보에 의하면 적어도 열몇체의 색채귀들이 있을테니까."

"어려운 싸움이 되겠어요."

"나도! 나도 끼워줘 어리!"


씰은 큐 파인드를 달랬다. 어리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역은 어느 때보다도 고요했다.




폭풍전야. 상상을 뛰어넘는 시련이, 모두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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