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오버진 23화
- : 할짓많다 HJMT
- 7월 31일
-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8월 16일

한편, 수호자들의 본거지에서는...
“꽤 오래 걸렸네, 바이젤루스.”
“시설이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지원하다 보니 늦어버렸군.“
“최대한 복구를 돕고 왔소.”
자영과 연락이 닿은지 반나절, 바이젤루스와 에터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먼저 기다리고 있었던 어리는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미안하오. 씰 씨에게서 얘기는 들었소.”
“아니야. 우리 모두 바빴으니까.“
“대범한 녀석들이군. 하지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전략이었다. 네 판단과 씰의 힘이 없었다면 곤란해졌을 거다.”
“나도 그래. 너희가 없었다면 경비대가 큰 피해를 봤을 거야.“
“생각해보니 에터, 크릴리아랑 만난 건 꽤 오랜만이지 않아?”
“그렇소.”
“걱정 됐거든. 연락했을 때 목소리에 구름이 껴있길래…“
“부하들의 부상을 걱정했을 거다. 만나보니 예전보다 활력 있더군.“
“다행이네…”
이윽고 수호자들의 기지에 도착하자,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씰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그들을 환대했다. 그녀의 뒤에선 자영과 큐 파인드가 치즈의 도움을 받아 메어를 만나러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돌아오셨군요.”
“늦어서 미안하군. 그나저나 통화를 먼저 끝내는 게…“
“아, 그렇네요… 여보세요, 그러면 조만간 뵈러 가겠습니다.“
씰이 옅은 이를 날개에 얹고 앞장서서 어리와 바이젤루스 일행을 인솔하려던 그때였다.
“안녕 바이젤루스-!”
“우왓, 깜짝이야!”
어리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서 치즈가 배시시 웃으며 혀를 메롱 내밀고 있었다. 그는 잠시 눈을 날카롭게 찌푸리며 그녀를 타이르려 했지만, 돌연 작은 미소를 보였다.
“그래. 그래야 너답지.”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라, 얼마나 장난치고 싶던지!“
“그렇게 풀어지는 것도 오랜만에 보는구려.”
“대장!!! 자영!!! 놀지 말고 빨리 도와!”
“큐 파인드, 나머진 우리가 하자. 거의 다 끝났잖아.”
잠시간 찾아온 평화 속에서, 그들은 누긋한 표정으로 따듯한 공기를 즐겼다. 북풍은 수호자들의 영역을 난색으로 물들이듯, 악산을 타고 슬며시 불어왔다. 에디와 지미의 엔진은 그런 공기를 빨아들이고는,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멋진 배기음을 주변으로 퍼뜨렸다.

“그렇군. 제자, 메어라고 했지. 설레겠군.“
“…당신도 이런 기분이었어?”
“그런 질문을 하다니. 바뀌었구나. 아니, 솔직해지고 있다 해야 할까.“
바이젤루스의 희미한 미소에서 자영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서 가자! 빨리 만나고 싶잖아?“
“그래. 그러면 모두, 메어를 데려올 때까지 잘 부탁해.“
“기다리겠소.”
“네.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연락해주세요.”
에터와 씰의 인사를 받으며, 그녀들은 옅은 이 위로 몸을 실었다. 큐 파인드가 영역을 불어넣자, 그들의 추진 장치에서 자홍색 불빛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메어라는 애, 장난 좀 잘 걸려들까나?”
“또 그런 생각부터 하고 있지…”
“아야! 이런 때가 아니라면 또 기다려야 한다고!“
어리가 능청스러운 농담을 하는 치즈에게 꿀밤을 때렸다. 그들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자영 일행을 태운 에디와 지미가 점점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영은 그 떠들썩한 모습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큐 파인드의 신호에 따라 옅은 이들이 북동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북동부의 아침색이 밝아왔다.
메어 일행의 잠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옅은 이들의 울음소리. 휘파람을 부는 것 같은 높고 청아한 소리가, 태양 빛을 타고 이리저리 퍼지고 있었다.그들은 시원한 푸른색이 연상되는 기분 좋은 느낌을 받았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메어 일행은 곧바로 몸을 쭉 뻗으며 경직되어 있던 온몸을 느슨하게 풀어줬다. 그리고 등나무의 이파리를 얼굴로 가져와, 그곳에 달려있던 물방울로 간단한 세수를 했다.
“좋아. 출발해볼까?”
잠을 유난히 푹 잔 것 같았다. 몸 안에서 느껴지는 팔팔한 기운은 어디라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호기로움을 불러일으켰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메어는 약속했던 장소로 향했다.
한 시간 정도 흘렀을 때였다. 변하지 않는 파초와 선인장의 향연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던 찰나, 메어의 뒤편에서 어두컴컴하고 스산한 기운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나무가 탄 것 같은 매캐한 냄새가 살짝씩 코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것은 영역이다.
“메어.”
“나도 느끼고 있어.”
“여러 명인가?”
“말도 안되지만, 한 명 같아.”
“믿을 수가 없군.”
화장했던 하늘이 점점 흐려지고, 주변에서 스스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위협을 느낀 옅은 이들이 도망치고 있다.
그 차가운 분위기는 소름 끼치는 속도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전력으로 질주해도, 따돌릴 수 없을 것이다. 영역의 주인이 더욱 가까워졌다. 고개를 돌리면 코앞에 얼굴이 보일 것이다.
몸이 화해지는 느낌이 들며 메어 일행은 얼어붙은 것 같이 서서히 느려졌다. 영역은 마치 늪처럼 질퍽거리는 느낌으로 그들의 목을 조르듯 번져왔다. 완전히 걸음을 멈춘 후에, 더는 나아갈 수 없다 생각한 그들은, 뼈가 끼긱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
“반가워요.”
그곳엔 키가 엇비슷한 색채 한 명만이 있었다. 숨 막히는 영역도, 우중충한 하늘도 없었다. 그는 고깔 모양의 모자 하나를 푹 눌러 쓰고 있었고, 뼈로 된 꼬리를 전갈처럼 달고 있었다. 모자는 마치 이빨을 내밀며 화가 난듯한 모양새로 찌그러져 있었고, 꼬리는 척추와 같이 여러 마디로 나뉘어 있었으며 끄트머리는 새의 두개골을 떠올리게 하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헛것이라도 보셨나요.“
메어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가, 안정을 되찾은 듯 평온히 뛰기 시작했다. 좁아졌던 시야가 돌아오며 온몸에 힘이 들어가더니 정신이 바짝 드는 느낌이 들었다. 신체의 말단 부분부터 시작해 매서워졌던 촉각도 천천히 누그러졌다. 바유와 옅은 이들 역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다행이네요.”
그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메어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퍼뜨리는 퀭한 기운은 텁텁하고 미지스러웠다. 무언가 어지럽기도, 잠이 오는 것 같기도 하는 모호한 기분이 들었다. 먹먹한 분위기의 목소리는 그 느낌을 배로 들게 하였다.
“드디어 만났네요. 한 달… 정도이려나.”
“그렇게 오랫동안… 날? 난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시켜서 온 입장이거든요. 당신을 초대하고 싶다고 하셔서.“
“누가? 그리고… 무슨 초대?”
“우선 따라오세요. 얘기를 나눠보고 싶으시다고…”
그가 꼬리를 이리저리 움직여대며 말하자, 메어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지금은 만날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나중에 가도 좋을까?”
“아니요.”
순간, 그의 목소리가 아주 낮아지자 메어의 동공이 세게 요동쳤다. 확실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아까 전의 영역이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위협을 느끼며,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 그러면… 음… 네 이름은 뭐야?”
“일리.“
“그럼 날 따라와 줘! 내 친구들만 만나고 바로 그곳으로 가자.”
“메어! 너…!”
일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에 바유가 얼굴을 찡그리며 메어에게 난색을 표현하자, 메어는 몰래 주먹을 빙글빙글 돌리며 수신호를 주었다.
‘속인다.’
이를 알아들은 그는 나머지 옅은 이들에게 따라오라 하며 메어의 몰래 명령을 전달했다.
일리와의 불편한 동행, 그 분위기를 깨기 위해 메어가 슬그머니 얘기를 꺼냈다.
“어디에서 왔어?”
“그냥 떠돌이예요.”
“나랑 비슷하구나? 예전에 서쪽을 돌아다니면서 살았지. 너는?“
“전부 다 가봤어요.”
“와, 색채들이랑 옅은 이들도 진짜 많이 만나봤겠네!“
“네… 뭐.”
아까까지 무념무상의 얼굴로 대답만 하던 일리는 그 말에 유독 눈살을 찌푸렸다. 메어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댔다.
“이것도 인연이네. 요즘 색채들을 많이 만났어! 어제도 그랬고, 만남의 향연이야!”
“…”
점점 지루한 대답이 오가던 때, 메어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에게 말했다.
“맞다! 내 이름은 마니악 메어, 가지색이야.”
“네.”
“너도 알려주지 않겠어?”
“일리.”
“참, 그건 들었지. 무슨 색이…”
“차가운 회색. 그런데 그게 뭐가 중요하죠?”
그가 말을 끊으며 날카롭게 대답했다. 바유와 옅은 이들은 그 싸한 분위기를 느끼고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런데 메어는 지체 없이 손뼉을 치며 웃음을 보였다.
“회색이라니, 멋있잖아! 깔끔하기도 하고.”
“…?“
“아… 아니야?“
“…계속 가죠.”
“으… 응. 미안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희끄무리했지만, 그는 눈썹을 살짝 들었다 내렸다. 메어는 다시 앞장서서 지도를 든 채 걸어갔다.
그렇게 나아가길 십여 분. 메어는 오른편 뒤에서 따라오는 일리를 힐끔 보았다. 그가 아주 잠깐 눈을 돌린 틈을 타, 그녀는 왼손으로 바유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바유와 옅은 이들은 서로 눈을 마주보며 명령을 주고받았다.
“여기야. 아담한 크기네.”
메어가 멈춘 곳 앞에는 희미한 갈색 빛을 띄는 물웅덩이 하나가 있었다. 땅콩 모양으로 생긴 웅덩이의 주위로는, 허리를 숙이고 머리카락을 내린 듯한 모습의 나무들이 풍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이제 기다리면 돼. 곧 올 거야.“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메어의 늑장에 그는 다시 눈을 찌푸리며 을씨년스러운 숨을 주변에 퍼뜨렸다. 그의 시선이 메어를 향하던 순간이었다.
‘후방으로!’
메어의 신호였다. 그녀와 일리는 물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눈치챌 리가 만무했다. 바유와 옅은 이들은 조용히 뭉쳐 일리의 등 근처로 다가갔다. 거치적거리는 느낌이 들었는지, 일리가 뒤로 고개를 뒤로 돌리려 했다.
“…!!!“
“뒤를 치려면, 한 번에 끝장내셨어야죠.”
가짓빛의 섬광은 정확히 일리의 시선을 향했지만, 그는 꼬리를 휘두름과 동시에 모자를 푹 눌러쓰며 번개로부터 눈을 보호했다.
그때 일리의 옆구리 쪽으로 나머지 옅은 이들이 다가와, 온몸에서 의지색을 내뿜었다. 바유가 빠르게 합류하며, 번개는 더욱 밝게 터지기 시작했다. 양동은 성공적이었고, 그는 잠시 시야를 빼앗겼다. 곧바로 메어와 바유는 옅은 이들에게 수신호를 주었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급박하게 뛰려 하던 때, 메어는 팔의 근육과 손가락 끝에서 이물감을 느꼈다.
피였다. 팔꿈치엔 아주 날카로운 것에 베인 것 같은 자상이 나있었다. 일리는 찡그린 눈을 두 팔로 감싸면서, 꼬리를 이곳저곳으로 휘두르며 날카로운 바람 같은 것을 날리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기엔 무서울 정도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메어… 빨리…!”
바유의 작은 외침을 들은 메어는 곧바로 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날아오는 일리의 공격들을 가까스로 피하며, 점점 그와 거리를 벌려나갔다.
소리는 옅어지고, 영역이 점점 희미해졌다. 아무래도 그의 시야에서 거의 다 벗어난 것 같았다. 하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메어 일행은 심장이 터질 정도로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머리가 겁에 질릴 정도로, 거의 무아지경으로 달려나가던 그때, 지면이 살짝 진동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의문을 품은 메어가 고개를 돌렸다.
“바유…”
“응?”
찰나의 순간, 차가운 회색의 영역이 질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펼쳐졌다. 삼 초가 채 되지 않아 그들의 발밑은 완전히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빠져나가려 주변을 돌아봐도 퇴로는 없었다. 달리는 것보다 빠르게 퍼지고 있는 일리의 영역만이 있을 뿐이었다.
“말도 안 돼. 그때보다 더…“
“메어! 당장…”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그렇게나 달려왔는데도, 그는 여유롭게 숨 하나 차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일리의 꼬리는 그들을 향해 치켜세워져 있었다.
“잠깐…”
그때 메어는 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순간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한 메어는 겨우 감각을 되찾고, 지친 듯 무릎을 꿇었다. 팔에서 흐르던 피는 차가운 회색빛으로 심히 물들어있었다.
“환각… 이었네…”
메어는 한 마디를 더 꺼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머리부터 시작해 팔목, 발목, 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갔다. 눈이 감기기 직전, 그녀는 땅에 떨어져 정신을 잃은 바유와 옅은 이들을 보았다.
고요한 숨소리만이 들려온다. 당해 기절과 같은 잠에 빠진 그들은 발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태평하게 곯아 떨어졌다. 그들의 움직임이 일리가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오른손을 뻗어 그녀의 뒷머리에 묶인 리본의 꼬리를 잡아당기려던 찰나, 메어의 의지색이 그의 손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파고들었다. 빠르게 거리를 벌렸지만, 그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듯 상반신을 떨었다.
“…좀 더 얘기 나눠보고 싶었는데.”.

“무슨 일이야…! 바유!”
“…음?”
바유가 휴양지라도 다녀온 것처럼 맑은 눈으로 하품을 해대며 깨어났다. 느릿느릿 초점이 돌아오자 보인 것은, 잔뜩 사색에 질린 자영이었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한 모습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너희! 다 어떻게 된 건가?”
자영의 어깨너머에선 큐 파인드가 옅은 이들을 흔들며 큰 소리로 그들을 깨우고 있었다. 그제야 바유는 상황을 파악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어디로 간 거지…?! 다들, 안 느껴지나?”
바유가 크게 소리치자, 정신을 차린 옅은 이들이 하나 둘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메어의 영역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남쪽, 아주 희미한 영역의 발자취가 그곳을 향해 뻗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메어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바유, 이게 무슨 일이야?”
“지금 설명할 때가…”
“자영! 그리고 거기 너, 빨리 와! 흔적은 찾았으니까, 바로 출발해야 해. 얘기는 가면서 하자고!“
“자, 오래 기다렸어. 드디어 다 채웠다고. 방방곡곡에서 데려온 녀석들로 말이지.”

시셀린의 앙칼진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널찍한 그곳은 콜로세움이라는 건물의 양식을 조악하게 모방하고 있었다. 그녀가 서 있는, 빛이 환하게 비치는 중앙을 기준으로 지름 수십 미터의 핑크빛 모래 바닥이 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모래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돌멩이들이 마치 이곳이 무대라는 것처럼, 십 센티 정도의 두께로 둘려 있었다. 바깥은 황토와 같이 약간의 수분을 머금은 고운 입자의 땅으로 되어 있었다. 사람 한 명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바깥 공간의 끝에는, 약간의 높이가 있는 벽돌 벽이 세워져 있었다.
그 위로는 두 단의 계단이 의자를 대신하고 있었다. 계단에 허리를 받친 몇몇 방문객들은 서로 크게 거리를 벌린 채 시셀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소와 같은 이목구비를 한 험상궂은 이가 숨을 짜내듯 들이 내쉬며 소리쳤다.
“너무 늦는 거 아닌가? 불쾌하군, 소문을 듣고 찾아와봤는데…”
“투기장에 처음인겐가? 원래 이렇다만, 잘 감내하거라.“
“아… 알겠… 습니다…”
그런 그의 맞은 편에서, 족히 육 미터는 되어 보이는 털북숭이의 거한이 그를 째려보며 무뚝뚝하게 일갈했다. 압도적인 육체를 눈에 담은 그는, 눈조차 마주 보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자신을 낮추며 목소리를 죽였다.
“자, 그럼 한 명씩 들어와 줘.”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장은 작게 진동하는 발걸음 소리로 들어찼다. 무대를 두른 벽의 양쪽에는 문짝 없는 통로가 두 개 나 있었다. 불 하나 없는 통로의 그림자가 꾸물대다, 마침내 시셀린의 부름을 받은 이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색채들이 하나둘씩 무대에 올라올 때마다, 쿰쿰하고 구역질 나는 냄새가 뒤죽박죽 섞여 진동하기 시작했다. 사자 갈기 같은 거친 털을 두텁게 두르고 있는 전갈, 하얀 안광을 내뿜는 외눈박이 난쟁이. 그런 인상적인 모습과는 달리, 그들은 대부분 영역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초짜들이었다. 몸의 발색도 불안정해 무슨 색이라고 단정 짓기 애매했다.
그때 만두와 같이 둥글고 주름 잡힌 몸에,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가진 푸르스름한 색채가 모습을 보였다. 비닐봉지 같은 투명한 모습의 몸체는 해파리를 연상케 했고 여섯개의 발에 둔탁한 가시가 박혀있는 게 제멋대로 생긴 칫솔처럼 보였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영역을 위협적으로 펼치며 기세등등이 걸어나왔다.
“호오…”
“무슨 색인지 알 수조차 없는 피라미군.”
시셀린이 감탄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갑자기 떨떠름한 표정으로 비웃었다. 그는 크게 화가 났는지, 힘이 바짝 넣어 빵빵하게 부풀린 여러 다발의 촉수를 그녀를 향해 날렸다.
“거 봐.”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 재빨리 왼쪽 날개를 널찍한 낫처럼 휘둘러 촉수를 조각조각 찢어놓았다. 그의 다리는 그렇게 무대 이곳저곳으로 처참히 잘려 흩뿌려졌다. 생김새와 맞지 않게 그 색채는 비둘기가 구우구우 거리는 소리를 내며 쏜살같이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의 신음이 멎자, 회장에는 실소와 야유가 오갔다.
“하하하!!! 무슨 배짱으로 도전한 녀석인겐가?”
“…색채라고 하기에도 민망하군.“
“닥쳐. 자, 계속해서 들어오라고.”
시셀린은 웅성대는 이들을 가볍게 무시하고선 사회를 이어나갔다.
“피쿠.”
“우길.”
“여기까지군. 총 다섯 명, 아니 네 명. 우리 투기장이 데려온 녀석들이야. 이제 너희 쪽 선수들을 봐볼까?
색채들이 걸어나온 문의 맞은 편에서 밤스가 슬그머니 걸어오더니, 무대 위에 모여있던 색채들을 일렬로 세워 회장 바깥으로 내보냈다. 잠시 후,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무게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들이 무대에 당도했을 때는 부패한 오물과 같은 악취가 회장 내부를 강타했다. 손님 중 일부는 헛구역질을 하며 손으로 코를 가렸지만, 대부분은 싱그러운 과일 꽃의 향기를 맡은 것처럼 기분 좋은 표정을 했다.
“자,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이름을 불러줘.”
“…으음…”
메어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을 때, 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벽에 걸려 있는 분홍빛의 양초들이 그곳을 희끄무리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꺼끌거리는 벽은 달표면처럼 거칠게 파여있었고, 양초와 양초 사이엔 오래된 나무 판자가 박혀 있었다. 힘없이 걸려있는 사슬도 눈에 띄었다. 눈을 크게 뜨자, 양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육중한 쇠고랑이 보였다.
“…뭐야? 여기는…“
메어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며 주변에 도움을 구했지만, 개미 방귀 소리 하나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곧바로 메어는 손목과 발목에 의지색을 집중시켜 몸을 달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하얀빛이 된 쇠고랑은 점점 물러지며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일리… 그래. 걔가 날 여기로 데려온 건가?“
“조용히 해. 이제 네 차례야.”
메어가 손을 털며 일어나려 하던 찰나, 그녀의 앞으로 시셀린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메어는 그녀를 경계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잠깐, 내 얘기에 대답해줘.”
“뭔데? 짧게 해.”
“여긴 어디야? 그리고 뭘 할 속셈이야? 그리고 바유는? 내 친구들은?”
“‘밤의 색 투기장‘이라고 부르지. 알았으면 이제 따라와.”
“설명이 부족해! 묻고 싶은 게 이것 말고도 한둘이 아니라고!!! 좀 더 자세하게…”
“따라오면, 모두 알게 될 거야.“

그녀가 메어의 외침을 무시한 채 어둠 너머로 걸어가자, 메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회장에 가까워질수록 풍겨오는 색채귀의 썩은 내에 메어는 질색하며 코를 막았다. 잠시 뒤 엄지손톱처럼 생긴 구멍이 눈 앞에 나타났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그 구멍의 크기가 커지며, 주위가 밝아져 갔다.
이윽고 메어는 시셀린과 함께 무대 위로 걸어갔다. 투기장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환호하는 사람들의 열기 따윈 없었다. 조용하고 울적했으며, 케케묵은 곰팡내가 났다. 무대의 중앙에 서 있던 밤스가 뒤로 살짝 물러나며 갓을 눌러 쓰자, 시셀린이 그 자리로 걸어가 뒷짐을 지었다.
“자, 여덟 번째 선수야. 소속은 없고… 뭐, 설명할 게 더 없네. 알고 있는 게 없거든.”
“흐음… 재밌어 보이는구려.”
“깔끔한 영역이네. 그리고 귀여운 얼굴이야?”
투기장의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서로 얘기를 나누던 사이, 시셀린이 메어를 향해 넌지시 얘기했다.
“넌 일리의 손에 잡혀 여기에 왔어. 그걸 시킨 건 티틀 녀석이지.”
“…티틀!!!”
“걱정 마. 네 옅은 이들은 무사할 테니.”
“여기서, 어떻게 나갈 수 있지?”
“앞으로 나올 쓰레기들을 모두 이겨 봐. 행운을 빌게.“
“…뭐?”
시셀린이 천천히 무대 밖으로 걸어가자, 이어서 밤스가 그녀의 반대편 벽으로 발을 옮겨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그럼, 바로 시작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