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오버진 24화
- : 할짓많다 HJMT
- 8월 16일
-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9월 6일

시간은 거침없이 흘렀고,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나 있었다.
‘바유와 애들은 어디에 있지? 밤의 색 투기장… 여긴 대체 뭘 하는 곳이지?’
메어는 차차 심호흡한 뒤, 눈을 굴리며 생각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심한 이질감, 악취로 가득 찬 실내. 그리고 티틀에 대해 알고 있는 저 노란색 녀석. 아무래도 이곳도 암시장과 관련된 게 분명하겠지.‘
그녀는 더러워진 옷을 가다듬으며, 단상 위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엇보다… 도망칠 여력이 전혀 없을 것 같아. 하나같이 영역을 숨기고 있는데도 상당한 기운이 느껴져.‘
메어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맞은 편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양옆에 서 있던 시셀린과 밤스도 무언가 기다리듯 그녀가 쳐다보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와. 첫 경기는 너부터야.“
“히익… 히이익…!!!”
시셀린의 매섭고 시큰둥한 말투와는 대조되게, 한없이 위축되고 겁에 질린 파리 같은 목소리가 문 안에서 들려왔다. 투기장의 둥근 공간을 타고 이리저리 부딪치며 왱왱거리는 느낌을 주었다. 시셀린이 화가 난 듯 영역을 조금 뻗어 나팔 소리를 내 위협하자, 그는 마지못해 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불그스름하고 갈빛의, 밤송이를 닮은 색채. 몸의 사방에 짧고 굵으면서도, 끝이 말려 들어간 생크림 장식 같은 가시들이 달려있었고, 두려움에 가득 찬 설치류의 얼굴은 그런 가시 밑에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었다. 네 개의 다리는 비대한 상체에 비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짧아, 그의 걸음걸이를 아기같이 아장아장 거리게 만들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헤… 헷지…”
“그리고 넌… 마니악 메어라고 들었는데.”
“맞아.”
시셀린이 둘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간단하게 말하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상대를 5초 안에 일어나지 못하게 하면 이기는 거야. 패배한 쪽을 처분할 권리는 승자와 그의 주인에게 달렸지. 이번엔 어떤 녀석이 승리를 거머쥘지 기대가 되는걸. 그럼 준비…”
“잠깐…”
“시작.”
횡설수설하던 메어를 둔 채, 시셀린은 무뚝뚝한 투로 경기의 서막을 알렸다. 얼타고 있었던 것은 그녀의 상대, 헷지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발을 떼지 않고 멀뚱멀뚱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삼 초 정도, 싸함이 흐르자 투기장의 좌석에서 구시렁거리는 탄식과 야유가 들려왔다. 물론 그 소리는 작고 약했으며, 설렁설렁한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이익!!!”
“그래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헷지가 앵앵대는 목소리와 함께 달려나갔다. 솔방울같이 생긴 넓은 상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상당히 위태롭게 보이는 것이 혹시나 발이 접질려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시셀린은 그의 적극적인 모습이 맘에 들었는지 계속해서 그를 부추겼다.
“녀석을 잡아. 이길 수 있어.”
약하게 진동하던 그의 몸체가 시동에 걸린 엔진처럼, 서서히 큰 폭으로 움직여댔다. 눈매는 날카로워졌고, 이윽고 영역이 서서히 빠져나오며 투기장 바닥을 적셔댔다.
메어는 헷지의 결심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것인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바로 시셀린을 향해 있었다.
“너…”
“받아라…!!!”
메어가 시셀린이 서 있던 방향을 향해 무언가 외치려던 순간, 헷지가 온몸을 날려 그녀의 몸을 가격했다. 막대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메어는 순식간에 경기장의 외벽으로 날아갔다.

“…!!!”
그녀는 부상 없이 일어났다. 벽에 강하게 박히기 전,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을 말은 뒤, 뒷머리를 묶고 있는 거대한 리본을 방패처럼 둘러 피해를 최소화했다.
“뭐야…”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메어가 헷지를 바라보자, 그는 울먹이며 온몸을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잡념을 떨치지 못한 모습이었다. 메어는 혼잣말을 하며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투기장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잠시 발재간을 부리다, 토끼처럼 뜀박질하며 곧바로 헷지의 다리를 걸어 무게 중심을 무너뜨렸다. 상체는 점점 중력에 이끌렸고, 균형이 순식간에 깨지며 그는 딱정벌레처럼 완전히 뒤집힌 채 다리를 하찮게 허우적거렸다.
“이제 잠자코 있어. 네가 진다 해도, 난 널 헤칠 생각이 없으니까. 이상 싸움은 하지 말자고.“
“…아니야… 아니야…!!!”
“…!!!”
꽤나 음산하고 힘이 담긴 그의 외침을 듣자,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메어는 발을 내빼며 두 팔을 십자로 치켜세웠다. 헷지는 여태 연기를 했던 것처럼, 거짓말같이 오뚝이처럼 반동을 줘 일어났다. 그러곤, 상체에 박혀 있는 갈고리 모양의 가시를 위협적으로 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경기가 되고 있네, 조금은.“
“결승, 기대해도 되려나?”
시셀린과 밤스는 둘의 대결을 지켜보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무슨 색인지 이름을 도통 알 수 없는, 오묘한 갈색이 삐져나와 땅을 물들였다. 썩은 카카오와 물러터진 밤 크림의 냄새가 이리저리 퍼져 나갔다. 영락없는 색채귀의 더부룩함이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갈고리 가시들은 메어의 양쪽 손목을 할퀴고 벽에 박혔다. 야구 배트로 힘껏 친 공과도 같은 속도로 엉겅퀴 같은 가시 무리가 지나가니, 그 단면은 당연하게도 지저분했다. 작지만 많은 자상을 입은 메어는 쓰라린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허점을 노린 헷지는 메어를 향해 다리를 놀렸다. 저번과는 달리 굉장한 기세였다.
이대로라면 벽에 박혀 등 쪽부터 뼈가 으스러질 것이다. 메어는 암흑 속에서 직감적으로 헷지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녀는 그대로 온몸에 가지색 번개를 둘러 상처를 지졌고, 동시에 헷지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럴 때 친구들이 있었더라면…‘
메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헷지가 점차 걸음을 멈추자, 메어는 그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헷지는 네 다리를 접어 그녀의 공격을 받아낼 준비를 했다.
변칙적인 움직임 없는 오른발차기가 날아갔다. 헷지는 예상했다는 듯 이를 받아낸 뒤, 다리가 있던 곳의 가시를 쏘아냈다. 그러자 메어는 쓰지 않았던 반대발로 가시를 옆으로 쳐냈다.

가시들은 동서남북 방향으로 마구잡이로 날려졌다. 오른발을 쓰면 왼발이, 왼발을 쓰면 오른발이 가시를 쳐내 가며 그의 철옹성 같은 등을 양파까듯 벗겨 냈다. 스무 개 남짓한 가시가 전부 날아간 뒤, 헷지의 상체는 나무 하나 남지 않은 민둥산 같이 되어버렸다.
헷지는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고, 메어는 틈을 주지 않고 오른발에 의지색을 둘러 그의 머리를 향해 내질렀다. 아주 잠깐 그의 울먹거리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녀는 아무 망설임이 없었다.
5, 4, 3, 2, 1
“잘했어, 메어. 네 승리네.”
“…”
시셀린은 손뼉을 치며 그녀에게 축하를 보냈다. 투기장 위의 관중석에서는 작은 아우성만이 들려왔다. 빈 동굴 안에서 종유석에 매달린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메어는 쓰러진 헷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자, 어떻게 할래. 죽일 거야?”
“아무것도 안 해. 여기서 풀어줘.”
그 말을 들은 시셀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재차 물었다.
“왜? 너를 상처 입힌 녀석이잖아. 거기다 색채귀라고?”
“나나 얘나, 강제로 잡혀 와서 싸운 거잖아.“
“어차피 이런 약한 녀석은 밖에 나가도 죽어. 이 녀석이 얼마나 많은 옅은 이들을 잡아먹었을지, 상상이 돼?“
“죽건 말건, 일말의 기회를 줘. 승자는 나니까. 그리고, 네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메어가 눈을 날카롭게 뜨며 그녀에게 쏘아붙이듯 얘기했다. 시셀린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 흠칫 오금을 저렸다. 애써 피식 웃으며, 그녀는 놀리는듯한 느낌으로 말했다.
“그래. 내가 선심 써줄게. 백지에 풀어주지.”
“…”
시셀린이 곧 타키 밤스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밤스, 이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 줘. 데리고 나가.”
“정말로? 안일한 판단일 수도 있다고, 그거.”
“규칙은 규칙이니까.”
그 말을 들은 타키 밤스는 조용히 헷지의 머리를 잡더니, 투기장의 바깥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계단 위에 앉아 있던 손님들은 시큰둥하고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장을 받치는 기둥에 뺨을 붙이고 졸고 있는 이가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아예 고개를 박고 잠에 빠져 있었다.
“미안해. 이번 경기는 좀 재미없었지. 그러면 지체없이 너희 선수의 차례로 넘어가야겠어.“
“잘 처리했는지요?”
“네. 물론 연락이 닿으려면 며칠 걸릴 겁니다.“
티틀이 코와와의 옆에서 뒷짐을 진 채 얘기하고 있었다. 어영부영 모여 비보를 전달받아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던 공동의 모습은 없어지고, 한기가 어느 정도 수그러들어 잠잠한 느낌이 되었다. 쭈뼛쭈뼛 등을 피고 일정한 거리를 두어 서 있는 딜러들과 수하들의 모습은 깔끔하게 일자로 정렬된 가로숫길을 연상케 했다.

범상치 않은 기류가 흐른다. 이전 세 딜러의 의논이 소꿉장난처럼 보일 정도로 엄숙했다. 곧, 절이 그 서막을 끊었다.
“이번 전쟁으로 저희는 이 세상의 새로운 패권자가 될 겁니다. 용신은 추락했고, 대지의 어머니는 재가 되었습니다. 수호자들의 얄팍한 힘은 누구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질서 아래, 색채귀들의 세상이 도래할 것입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모두는 등과 목을 타고 올라오는 저릿한 느낌을 받았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코와와, 시종일관 무표정인 제이 룽을 제외하면 모두 눈 밑 살이 조금씩 떨리거나,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작게 깨물고 있었다.
“티틀, 전쟁에 참여하게 될 병력과 대치 세력은 정리해놓았겠죠?”
“물론이지요.”
티틀이 한 발짝 앞으로 걸어나오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먼저 저희 병력입니다. 저와 다예람을 포함해서 딜러 다섯 명. 포폭스 그리고 휘하 이십여 명 정도의 수하들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 가까이 있는 색채귀들부터 복귀시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론 코와와의 호위 세이프티 매니저들이 있겠군요.“
“그렇다. 그리고 코와와님의 호위 병력은, 지금부터 내가 맡는다.”
“…? 넌… 엑시로스?”
티틀이 놀란 얼굴로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동에 있던 다른 이들도 일제히 눈을 돌렸고, 저마다 크고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자리에는 푸른빛의 로브를 기품있게 둘렀지만, 이와 대비되는 험악하게 생긴 가시가 박힌 망치를 맨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날카로운 두상에 가운데 딱 박힌, 외눈의 늑대 인간. 걸걸한 저음과 귀에 꽂히는 약간의 고음이 합쳐진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 전대 요트 딜러. 제 충견을 지키던 또 다른 충견.”
“하하, 뭐 충분히 살아있을 만 했어.”
티틀은 도끼눈을 뜨며 웃음을 짓고 그를 바라봤다. 이에 질세라 엑시로스는 한치의 미동 없이 그를 매섭게 쳐다봤다.

“아, 그만. 너랑 눈싸움은 질색이야, 무섭다고.”
“농담에 품위가 없군. 마스터 딜러가 이래서야. 내 부하들에겐 더 손대지 마라.”

“걱정 마셔. 내 분신이 직접 가고 있으니까. 귀하게 모셔올 테니.”
엑시로스는 혀를 끌끌 차며 다예람에게 걸어갔다.
“잠깐 실례하겠다.”
“아… 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다예람에게 자리를 내달라는 듯 손짓을 했다. 엑시로스는 마치 처음부터 회의에 있었다는듯 허리를 곧게 펴고 조용하게 다예람의 옆에 섰다. 조금씩 위축되어있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차분한 모습이었다.
“…뭐 그렇네요. 저 녀석까지. 저희의 전력입니다.”
티틀이 다시 절을 바라보며 보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대치 세력입니다. 이들과의 전투 경험이 있는 여러분의 의견을 주신다면 좋겠군요. 먼저 수호자들입니다.“
“본부를 얘기하는 거겠죠?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도 그때 있었으니까요.”
어색하게 존칭을 쓰는 티틀의 모습은 파리채에 맞아 빌빌거리는 벌레가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절(折)의 말을 듣던 코와와와 엑시로스가 티틀을 째려보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선 씰. 수호자들의 나침반이자 이음매. 전투력도 없고, 항상 지휘부에서 나오지 않지만 그녀가 곧 수호자들의 두뇌입니다. 처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군요.”
“그렇게 총명한 당신조차 속았으니까요.”
절(折)의 놀림을 듣는 둥 마는 둥 티틀은 양손을 서로 만지작거리며 얘기를 계속했다.
“큐 파인드. 이형의 색채인 만큼 신체 능력과 잠재력은 좋지만, 어리숙한 색채입니다.”
“수호자들의 마지막 간부군요. 그녀는 대전쟁 시절 꽤 활약했었죠. 너무 무시하진 마시길.”
“그리고, 치즈. 수호자들의 창입니다. 예전 침입 사건 때 대면해봐서 잘 알죠. 그녀는 감각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액체를 걸치고 다니는 숙녀분 얘기인가?”
“맞아. 넌 자영이랑 화영을 맡느라 제대로 못 봤겠네.”
엑시로스가 넌지시 말하자 티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의 어딘가 모양빠 지면서도 귀티 있는 언동은 묘하게 비웃음을 사게 하였다. 바로 옆에 서 있던 다예람은 마음속으로 끅끅거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대화와 회의를 오가며 잠시 어지러운 기류가 흐르자, 의지를 꺾는 자는 다시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영역을 약하게 뒤흔들었다. 비리디언 빛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느낀 그들은 행동은 물론 잡생각까지 멈춘 채 목을 쭉 폈다.
“마지막으로 수장인 어리입니다. 비밀스러운 점이 많죠. 전선에서도 상당한 무위를 떨쳤고, 두뇌도 비상합니다.”
“당해봐서 잘 알아.”
티틀에게서 ‘어리’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의 왼편에 서 있던 코와와가 말을 꺼냈다.
“그러네. 그때 넌 녀석이랑 싸웠었지. 나도 며칠 전에 몸소 느껴보고 왔어.”
“내 싸움은 필연이었지만, 넌 자만 때문이었어. 그렇게 방심해서 임무도 실패했고.”
“뭐 실패한 건 아쉬운 거지. 하지만 절 님이 기회를 주셨잖아?”
“조용히. 잡담은 더 하지 마세요 티틀, 코와와. 도움이 될 정보만 얘기하세요.”
그녀의 따가운 목소리에, 티틀은 바로 얼굴을 돌려 헛기침을 해댔다. 코와와는 그 모습이 꼴불견이었는지 떠 있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수호자들을 돕는 세력을 살펴보죠. 일단, 멀리 떨어져 있는 경비대들은 제외하겠습니다. 이미 일부 시설은 제 작전 아래 파괴되었습니다. 남은 건 그들에게 호의적인 방랑색과 백지령들이겠죠.”
“대전쟁이 되는 건가.”
“괜찮아 제이 룽.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수호자들. 머리만 자른다면 알아서 와해될 거야. 퀴스피드의 의지색을 이용한다면 기동적인 면에서나, 정보 면에서나 모두 우리가 유리하지.”
“방랑색들 중 유의할 색채들은 누가 있죠?”
절(折)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하자 티틀이 답했다.
“자영입니다. 이전에도 저에게 말씀하셨지만…”
“아, 잊고 있었네요. 그런 친구도 있었죠.”
“저에게 명령을 내리신 게 언제인데… 뭐, 그렇지만 충분히 위협적입니다. 무엇보다 당신에게 원수를 졌으니까요. 적극 참여할 겁니다.”
“제게 원수를 진다 한들, 무엇이 변할까요. 그녀의 화가 곧 단말마의 비명이 되겠군요.”
절(折)이 자영의 이름을 듣고 오랜 친구를 떠올리듯 말했다. 그녀의 처지를 비관하며 웃는 모습은 가히 뒤틀린 울음소리를 내는 까마귀떼를 보는 듯했다. 인면수심의 티틀마저 그 모습을 보며 항상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바닥으로 내칠 정도로 본능적인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 가장 성가신 적일 겁니다. 바이젤루스와 에터.”
“뭐? 그 녀석들에게 원한을 산 건가? 보통 일을 저지른 게 아니군 티틀.”
“아니? 난 손댄 적이 없어. 기껏 해봐야 절 님의 명령대로 자영을 쫓은 게 끝이지.”
엑시로스가 어이없어하며 티틀에게 말하자, 그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답한 뒤 절(折)의 심기를 생각해 바로 말을 돌렸다.
“자, 그 일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아무튼, 바이젤루스는 아주 성가실 겁니다. 어쩌면 수호자들 이상일 수도 있죠.”
“하지만 비협조적이잖아요? 저번에도 그랬었죠. 자영을 내버리려고 했으니까요.”
“그게 문제야. 이 전쟁에 얼마만큼 관여할지, 예측되지 않아.”
다예람의 말에 티틀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뒤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최악의 상황은, 그들이 우릴 일망타진하기 위해 연합을 꾸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 외로 방랑색들은 그렇게 정의롭지 않죠.”
티틀이 말을 끝마치자, 대략 오 초간의 침묵이 대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절(折)이 티틀을 향해 고개를 꺾어 말했다.
“그 밖에 위험 요소는 없나요?”
“일부 야생 색채귀가 휘말려 전선이 어지러워질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은 생각나지 않네요.“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자는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변수는 대강 거기까지군요.”
의지를 꺾는 자는 이전처럼 머리에서 광을 뿜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당분간 제 영역 밖으로 나가도 상관없습니다. 티틀이 부른 병력이 모일 시점까진, 다시 공동으로 모여주시길.”
“초록빛의 풀밭을 위하여.“
그녀의 말이 끝나자 코와와는 이전처럼 구호를 외쳤고, 다른 딜러와 수하들 역시 고개를 숙이며 어물쩍하게 합창했다.
티틀과 다예람이 본거지에서 나와 걷고 있었다. 허허벌판에 작은 돌 몇 개가 박힌 것이 끝인 익숙한 서쪽의 풍경이었다. 계약이 끝난 사나운 부취는 따분하게 기다린 것에 성질을 내며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이 점처럼 보일 때쯤, 티틀이 입을 열었다.
“이어서 얘기하자고.“
“역시 제 생각이 맞았어요. 너무 무모한 판단이었잖아요. 이렇게 될 것도, 예상하고 계셨나요?”
“아니. 근데 적어도 난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제 목숨은요? 도통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다예람이 눈을 찡그리며 말하자, 티틀은 언제나 그랬듯 능글거리는 고양이 입 모양과 함께 너스레를 떨었다.
“네 능력을 의심치 마. 너도 충분히 쓸만한 자원인걸.”
“…그래서, 무언가 알아내셨나요?”
“절의 목적 말이지. 무언가 거대한 걸 준비했나 생각했는데, 겨우 내 능력에 숟가락을 얹고 버리려는 속셈이잖아?”
“떠나실 건가요?”
“그렇게 되겠지. 그나저나 참 신기하네. 절은 그럴 여력이 없을 텐데 말이야.”
티틀은 골똘히 생각하듯 턱에 오른손을 갖다 대며 쓸어냈다.
“이 얼굴도 곧 못 보게 될 거라고. 많이 봐 둬.“
“그럴 리가요.”
“코와와 님. 다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랜만이야. 외딴 영역에 갇혀있는 건 참 힘든 일이네.“
“다른 매니저들이 그립군요. 아직도 변방에 있다니.“
“그것도 이제 끝이야. 이제 패권은 우리에게 돌아왔으니까.“
코와와와 엑시로스는 본거지의 대문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뒤 그들의 옆으로 제이 룽이 걸어왔다.
“앞으로 함께 하게 되겠군.”
“자네가 제이 룽인가?“
그의 말에 엑시로스가 반가워하듯 밝은 조의 목소리로 화답했다.
“철두철미한 사람은 조직에 꼭 필요하지. 어떻게 요트 딜러까지 잘 올라왔군.”
“내 친우에 대한 일만 생각하면, 난 필사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의 말엔 무덤덤하면서도 분노가 차 있었다. 그 감정을 모르는지, 코와와는 비아냥거리는 듯 말했다.
“그건 우리도 그렇거든. 당연한 감정이야.”
“그런가. 진심으로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군.”
제이 룽은 그의 말을 들으며 작은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머리 아픈 상황이군. 절은 소탕 사건 이후로 사라졌던 걸로 알고 있었다만… 벌레 자식이 잘도 일을 벌여놓았군.”
“녀석은 무언갈 숨기고 남을 속이는 데에 일가견이 있어.”
“결국 전쟁이라는 결과는 변함이 없군.”
“하루빨리 네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좋겠군. 그때까지 절에 대한 충성을 마다하지 말길 바라.”
제이 룽의 말에 코와와는 냉담하면서도 동정심이 담긴 말로 그를 감싸주었다.
“나중에 같이 유유자적한 여행지를 가주지. 내가 유배 갔을 때 있었던 곳이다.”
“생각해보도록 하지.
제이 룽은 엑시로스의 넉살 좋은 말에 대충 대꾸했다. 그는 코와와와 엑시로스를 뒤로 하며 공동을 빠져나가는 돌 받침에 몸을 실었다.
“뭐, 그래도 맘에 드는 녀석이야.”
“동감합니다. 누구처럼 구린 속내가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남겨진 둘도 제이 룽을 따라 지상으로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호오, 그것참 놀랍군요.”
모두가 떠나고 닫힌 본거지의 대문에서 혼잣말이 들려왔다.
“우리 티틀 님에게 이런 비밀이 있었다니.”

“아주 훌륭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