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대체 왜?”
상당한 거리를 정신없이 뛴 그녀는 살아있는 시체가 된 것처럼 엉금엉금 걷고 있었다. 메어는 중얼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유는 그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영은 너를 믿고 있었던 거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
“멋대로 생각하지 마. 난 그냥 짐짝이었어.”
메어는 고개를 푹 숙이며 짜증 나는 투로 답했다.
“메어.”
“막무가내인 날 받아주고, 도와주고… 결국은 나 때문에…”
메어의 말끝이 떨렸다. 그 미세한 진동은 구슬펐다. 메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내가…”
“그래서, 이대로 뭘 할 거냐? 자영은 너에게 기회를 줬다. 자신을 바쳐가면서까지. 예전의 일은 잊어라,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지 생각해라!”
바유가 크게 호통쳤다. 메어는 격양되며 소리쳤다.
“뭘 아는데!! 난 도움만 받았다고… 이해할 도리도 없어… 넌 알 수 있어?”
“자영은 너를 만나 변했다. 너도 느끼지 않았나? 넌 그녀에게 거슬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결코 그 시간은 아깝지 않았다. 넌 많은 것을 얻었다. 자영도 많은 것을 받았다.”
“…”
“당당해져라. 네가 그녀에게 말한 것처럼. 도망에도 목적은 있다. 자영이 널 구한 것도 그렇다. 그녀의 의지를 존중해라.”
메어는 한참을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았다고…”
메어가 바지에 묻은 하얀 모래를 털면서 일어났다. 바유는 힘없는 그녀를 부축했다. 메어의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그래도 아직… 난 모르겠어.”
그녀의 목소리는 삼킨 눈물들로 잠겨 끓고 있었다.
“나중에도 그런다면… 도와줘…”
“원래 우린 그런 사이였다.”
바유와 옅은 이들은 웃으며 답했다.
메어 일행은 허전함을 느끼며 동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허허벌판이었던 서쪽과는 다르게 하얀 바위와 회색빛 나무들이 울퉁불퉁 나타났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이름 모를 옅은 이들도 보였다. 지친 그들은 거대한 바위 밑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늦은 점심에 다시 출발한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굉장히 높은 나무들이 즐비한 한 숲에 도착했다. 나무들은 넓은 잎을 가지고 있었고, 뒤집어놓은 고깔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굉장히 높네…”
“돌아서 가기엔 엄청난 규모군.”
“들어가 보자.”
메어와 바유는 천천히 숲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숲 내부는 높고 이리저리 자란, 잔가지의 이파리 때문에 굉장히 어두웠다.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가뭄의 단비 같은 빛은 바늘구멍만 했지만, 적어도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광량을 제공하고 있었다. 메어 일행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바닥에서는 길다랗게 생긴 옅은 이가 가끔 나타나곤 했다. 뱀을 닮은 녀석은 메어의 기척이 느껴지자마자 주변에 파여 있던 구멍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그들의 눈이 어둠에 적응했을 무렵이었다.
쿵-
메어의 뒤쪽에서 묵직한 폭음이 옅게 들려왔다. 아마 상당히 먼 거리인 것 같았다. 메어가 뒤를 돌아보며 영역을 꺼냈다. 그러자 영역의 끄트머리에서 뜨겁고 어지러운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색채귀가 오고 있네.”
“능숙해졌군, 메어.”
메어는 속도를 줄이며 감지에 집중했다. 녀석은 점점 그녀의 영역을 가로지르며 메어에게 다가왔고, 가시권에 들어오자 그녀와 바유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빛 하나 귀한 이 숲에서, 압도적인 밝기를 내보이며 녀석이 나타났다. 녀석의 주위는 불길로 휩싸였고 백색의 나무들은 유황빛으로 변했다. 타오른 지 수초도 지나지 않은 나무들은 껍데기만 남아 툭툭 쓰러졌다. 주위가 잿더미가 되자 그 형체가 점점 정확해지기 시작했다.
카멜레온이라는 생물이 있다. 광범위하게 돌릴 수 있는 커다란 양 눈과,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 형태의 꼬리, 집게를 연상케 하는 앞발과 뒷발을 가졌고, 개구리같이 긴 혀를 가지고 있다. 녀석은 그 생물을 닮아 있었다. 대신 단단한 돌로 된 몸을 가졌고, 내핵에서 나오는 불빛이 눈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 녀석의 등은 산봉우리처럼 우뚝 솟아있었고, 그 위는 화산과 같이 붉게 타오르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몸 곳곳에 사각형 모양 결정들이 박혀있는 것은 덤이었다.
녀석의 이름은 ‘볼비레온’. 메어의 냄새를 쫓아 추격해 온 암시장의 색채귀였다. 그는 치명적으로 굼떴지만, 메어의 이동이 늦어지고 방해받은 탓에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볼비레온이 크게 포효하며 속도를 올렸다. 그녀는 태세를 갖추며 몸을 숙였다. 오른 다리에 가지색 번개가 감기며, 기타 줄이 튕기는 소리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볼비레온은 유황빛의 끈적한 영역을 내뿜었다. 녀석의 불빛은 이전까지 컴컴한 것만 보고 있던 그들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메어가 달려나가며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그녀는 볼비레온의 옆구리로 접근했다. 굼뜬 그 녀석이 고개를 천천히 돌리는 동안, 메어는 목표 지점에 의지색을 두른 돌려차기를 적중시켰다.
“?!”
그런데 녀석은 태연했다. 메어가 침착하게 거리를 벌리며 공격이 들어간 곳을 보았다. 볼비레온의 옆구리엔 작은 구멍만이 파여있었을 뿐, 충격조차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메어는 이번에 볼비레온의 머리를 노렸다. 녀석을 혼란시키기 위해 좌우로 빠르게 이동하며 궤도를 어지럽혔다. 순간 메어는 움직임을 멈추자, 볼비레온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메어는 이 순간을 노려 높게 점프했고, 그대로 종아리에 의지색을 감아 머리를 가격했다.
공격이 들어가자마자 메어는 뒷걸음질을 치며 상황을 보았다. 녀석의 머리는 큰 충격을 받아 지면에 닿아 있었다. 이마와 정수리 부분에는 세로로 움푹 파인 자국이 선명했다.
그러나 볼비레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다. 녀석이 몸을 털자, 파여있던 두 상처는 자갈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재생되었다. 메어가 흠칫하며 더 거리를 벌리자, 녀석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게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유황불이 살짝씩 화륵거렸다. 이윽고 녀석이 의지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기가 점점 뜨거워진다. 멀리 있던 메어와 바유도 그 기운을 느꼈다. 고요히 흐르는 공 소리가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었다.
볼비레온의 눈을 포함한 몸 곳곳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녀석의 몸은 대기를 일렁이게 하고 있었다. 다음 공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의 등에 있는 화산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작은 봉우리라는 것이 무색한 굉음과 함께, 용암과 화산재가 하늘로 치솟았다. 잠시 후, 솟구쳤던 화산의 내용물들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용암의 겉면이 굳어 포탄과 같이 떨어졌고, 화산재는 눈처럼 펑펑 쏟아졌다.
“메어, 일단 후퇴하자. 상황이 좋지 않다.”
“알았어. 일단 앞장서 주겠어? 틈틈이 녀석을 주시해야겠어.”
메어 일행은 바유를 필두로 숲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아까의 굼뜬 모습과는 달리, 볼비레온은 상당한 속도로 그들을 따라왔다.
종종 화산탄들이 쌍방으로 날아오며 위협을 가했다. 메어는 볼비레온을 보며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녀석의 돌로 되어있는 신체에 메어의 의지색은 의미가 없었다. 거기에 맞아도 다시 회복되는, 리머미와 비슷한 부류. 제대로 힘을 가했을 두 공격에도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의지색은 용암을 분출하는 것 같았다. 단순하지만, 가히 위협적이었다.
“정보가 부족해. 좀 더 싸워봐야 할 것 같아.”
“정면전은 확실히 무리다.”
“일단 모두, 날 따라와. 영역을 숨기고 정보를 얻어봐야겠어.”
메어는 발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꺾은 뒤, 영역을 숨겼다.
잠시 후, 볼비레온이 메어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의지색으로 이루어진 전기 덩어리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거기다 메어의 발자취가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무엇이 진짜인지 혼란스러웠던 녀석은 크게 화를 내며 주위를 모두 불태우기 시작했다. 불길은 고리 모양으로 퍼져 나가며 메어가 숨어있는 곳으로 점점 다가갔다.
볼비레온의 왼편에 있던, 유달리 굵고 높은 나무에 불꽃이 닿았을 때였다. 그곳은 그녀가 숨어 있던 위치였고, 미리 그 나무의 밑동을 수차례 패 홈을 만들어 놓았다. 불에 휩싸인 밑동은 빠르게 불타 사라졌고, 이내 머리 부분이 볼비레온을 향해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메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무 윗동에 발차기를 날려 가속도를 붙였다. 녀석은 당황할 틈도 없이 거대한 통나무에 묵사발이 되었다.
“자, 이제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고.”
“시시하게 끝나진 않을 것 같다.
메어와 바유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땅에 쓰러진 거대한 나무 주위를 돌았다. 잠시 뒤, 통나무와 땅에 맞닿아 있던 부위가 유황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물러나!”
그들이 뒤로 물러나자, 통나무가 쩌적하며 갈라졌다. 나무의 윗동까지 유황빛이 번졌을 무렵, 거대한 불꽃이 솟구치며 볼비레온이 다시 몸을 드러냈다. 녀석의 몸은 머리와 등으로 나눠 절반 가까이 짓뭉개져 있었다. 나무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가 선명했고, 마치 두 다리만 가진 짐승이 힘겹게 걷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눌려서 사라진 부위에선 용암과 불꽃이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볼비레온이 포효했다. 그러자 그의 몸이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서서히 수복되기 시작했다. 메어는 그때, 용암과 불꽃 사이로 보이는 구체 형태의 무언가를 보았다.
“저거야. 녀석도 리머미랑 같아!”
“심장 같은 거군.”
메어가 옅은 이들을 일자로 세우고, 의지색을 감응시켜 번개로 된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화살이 닿기 전, 녀석의 갑피가 재생되었고, 절호의 기회는 날아갔다. 그들이 잠시 무방비해진 틈을 노려, 볼비레온은 입에서 작은 화산탄을 발사했다. 화산탄은 메어의 오른쪽 어깨에 적중했다.
“윽!”
“메어!!”
메어의 상처는 꽤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래도 뼈와 근육은 어느 정도 무사했다. 그녀는 상처에 옮겨 붙은 유황불을 털어냈다. 타버린 옷소매와 불씨들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다시 녀석으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볼비레온이 작은 화산탄을 쏘며 추격했다. 메어 일행은 거꾸로 달리며 화산탄을 피했다. 화산탄이 주변 나무에 박히며, 겉이 유황빛으로 그을려졌다.
“일단… 이걸로 됐어. 모두 파악했으니, 녀석을 쓰러뜨리기만 하면 돼.”
메어는 아픈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써 웃었다.
“녀석이 또 이 작전에 당해줄까?”
“글쎄…”
그녀는 화산탄에 맞은 나무 하나를 유심히 보았다. 작은 그 나무의 기둥 중간엔, 화산탄이 뚫고 날아간 흔적이 보였다. 관통된 자리에선 수액이 양쪽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떠오른 게 있어.”
“뭐지?”
“맡겨만 줘. 신호를 주면 바로 화살을 발사할 준비를 마쳐줘.”
산개한 메어 일행은 배후를 제외한 모든 방향에서 볼비레온을 주시하고 있었다. 녀석은 천천히 다가가며 주위에 화산탄을 조금씩 발사했다. 그럴 때마다, 메어와 그들은 작전대로 후퇴했다. 점점 옥죄여오는 상황, 메어가 볼비레온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날카롭게 부서진 돌덩이 두 개가 들려있었다. 숲에 널브러져 있던 거대한 돌을 쪼개 가져온 것이었다.
볼비레온은 메어를 보자마자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녀석의 오른쪽 옆구리로 이동했다. 볼비레온이 머리를 꺾자, 메어는 발차기로 녀석의 머리를 하늘로 들리게 하였다. 틈을 놓치지 않고 메어는 들고 있던 돌덩이 중 하나를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그리곤 있는 힘껏 걷어찼다. 박힌 돌에 의해 녀석의 코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왼쪽으로 이동했다. 방향감각에 이상이 생긴 듯, 녀석이 비틀대기 시작했다.
메어는 빠르게 왼쪽 옆구리로 이동해, 다시 한 번 날카로운 돌을 꽂아넣었다. 볼비레온은 이 작전을 이해했다. 코어를 한쪽으로 이동시키고, 표면과 가까워진 쪽에 유효타를 날려 부숴버리는 것이다. 그녀가 박힌 돌을 걷어차려는 순간, 볼비레온은 다시 분노하며 주변을 불태웠다. 메어가 뒤로 물러나자, 다시금 볼비레온의 눈과 몸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대기가 뜨거워지다가, 끝내 녀석의 등이 폭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메어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신호를 주자, 바유와 옅은 이가 빠르게 줄을 지었다.
마침내 볼비레온의 등이 폭발했다. 용암과 화산재가 다시 한 번 하늘로 흩뿌려졌다. 그런데 볼비레온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뾰족한 돌이 꽂힌 오른쪽 부분의 색이 빛나다, 쩌적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양쪽으로 수액이 흐르던 나무를 보고 고안한 방법이었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녀석의 코어가 노출되는 데엔 충분했다.
메어는 옅은 이들을 정렬해 화살을 겨눴다. 수신호를 주자 번개가 튕기듯 날아가며 볼비레온의 중심부에 정확히 꽂혔다. 녀석은 크게 몸부림쳤다. 온몸을 꺾고 뒤흔들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풀썩 주저앉았다. 이내 그의 몸과 지면이 맞닿으며 움직임이 멈췄다. 불씨가 꺼져가듯 볼비레온의 무늬도 점점 빛을 잃어갔다.
“…!”
메어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녀석을 확인했다. 볼비레온의 코어는 크게 손상되어 있었다. 그의 신체는 더는 재생되지 않았고, 잘게 부서지며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메어 일행만의 첫 승리가 찾아왔다. 그들은 안도한듯 숨을 내뱉었다. 메어는 바닥에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 녀석의 잔해에 갖다 댔다. 나뭇가지의 끝에 불이 옮겨붙으며 유황색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적으로 만났지만, 다음에 만난다면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
메어는 볼비레온에게 겸허히 작별을 고했다. 그녀는 횃불을 들고 바유와 옅은 이들에게 돌아갔다.
씰은 눈을 감고 의지색으로 전황을 감지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정보를 정리한 씰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티틀이 의지색을 쪼개 분신을 만들어놓았던 것 같네요. 치즈 씨와 파인드는 본체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어요.”
“티틀이 영역을 꺼냈어?”
“네. 위치는 일점산이에요.”
“그렇구나. 판단은 틀리지 않은 것 같네.”
“에터 씨의 기운도 느껴져요.”
“… 역시.”
“어리 씨, 어디까지 보고 계셨나요?”
“너와 같은 의지색을 갖고 병력을 지휘할 사람은, 티틀 밖에 없지. 분신을 써서라도 본거지에 있었을 거야.”
“티틀이 일점산에 병력을 모은 것도, 저희의 본거지와 가깝기 때문이죠.”
“에터와 바이젤루스는, 그녀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을 테니까.”
“또 도움만 받는군요…”
“그러게… 쌓인 빚이 많아.”
“이쪽은 잠시 그들에게 맡기죠. 시간을 꽤 써버렸어요. 많은 이들이 지금도 우릴 필요로 할 거예요.”
“그래. 경비대들에게 연락해보자고.”
“오랜만에 만나는군, 자영.”
바이젤루스가 자영에게 인사했다. 그의 목소리는 절제되어있었고, 어딘가 차가우면서도 따뜻했다.
자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 온 거야? 내가 죽는 게 안타까워서?”
“아니. 네 결정을 보고 왔다.”
바이젤루스가 자영의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티틀은 상당히 흥분하며 바이젤루스에게 얘기했다.
“그토록 고귀하시다는 보라색 색채… 여기 왜 오셨을까? 녀석의 언니가 죽은 건 너랑은 전혀 관계없을 텐데?”
“하지만 최소한의 책임이 있다.”
티틀이 그 말을 듣자 실실 웃으며 바이젤루스를 놀려댔다.
“이미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셔. 쓸모없는 감정 소비거든.”
“그런가. 하지만 그럴 순 없다. 내가 마음이 여려서 말이야.”
“푸핫!”
바이젤루스가 덤덤히 대답하자 티틀은 참지 못하고 폭소했다. 자영과 에터, 바이젤루스는 모두 무표정으로 티틀을 바라봤다. 그가 신이 나게 웃는 동안, 에터는 자영 옆에 다가갔다. 바이젤루스는 티틀을 보며 말했다.
“잠시 기다려주면 좋겠군. 우리는 할 얘기가 있다.”
“저희를 무시하시는 건가요?”
다예람이 티틀의 뒤에서 나타나 바이젤루스를 향해 숟가락을 뻗었다. 그녀가 휘두른 숟가락의 끝에서 압축된 참격 형태의 찻물이, 빠른 속도로 뻗어 나갔다.
바이젤루스는 가까워진 찻물의 끄트머리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러자 그것이 일렁이더니 속도와 형태를 잃으며 주르륵 흘러내렸다.
“기다려주겠나?”
그 말을 듣자 다예람이 눈을 매섭게 떴다. 그녀는 숟가락을 양손으로 고쳐잡아, 바이젤루스에게 달려들었다.
“이 자식이…!!”
“다시 한번 말하겠다. 기다려라.”
바이젤루스는 순간 사라졌다가 다예람 앞에 나타났다. 그는 어느새 오른쪽 다리를 뒤로 뻗고 있었다. 동작이 생략되어 보일 정도의 속도로 발길질이 날아가며, 다예람의 몸에 정통으로 꽂혔다.
그녀는 각혈하며 하늘 위로 붕 떴다. 떨어지는 다예람을 퀴스피드가 받아내더니, 원래 그녀가 있었던 자리로 복귀했다.
다예람이 퀴스피드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일어섰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의지색을 크게 발하려 했다. 티틀은 웃음을 멈추고 그녀를 제지하며 말했다.
“예람, 일단 가만히 있어.”
“하지만….!!”
“네 예쁜 얼굴이 구겨지잖아. 그만해.”
바이젤루스는 어느새 자영이 있던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난 자영의 편이 아니다. 단, 그녀의 선택에 따라 도울 수도 있고, 돕지 않을 수도 있지.”
에터는 침묵했다. 자영은 아직도 둘을 경계하고 있었다. 바이젤루스가 그녀에게 걸어가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넌, 미숙한 색채를 위해 화영과 같은 길을 택했다.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가? 의심하고 있다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거지?”
바이젤루스가 그녀의 앞에 멈춰섰다.
“당신이 뭘 알아…!! 그냥… 내 몸이 멋대로…”
“자신을 믿지 않는 녀석이 타인을 신뢰하는 건가? 앞뒤가 맞지 않는군.”
“난 그저, 이 악연을 끝내려고 한 거야…”
“그래, 언니와 똑같지 않은가.”
자영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이를 꽉 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고조된 분위기와 달리 그녀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조용히 슬퍼했다.
“그럼 말하겠다. 두 가지 선택지를 주겠다. 첫 번째, 너를 살려주겠다. 에터와 내가 이들을 모두 쓸어주지. 더 나아가 내 힘으로 모든 악연을 정리해주겠다.”
티틀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다예람은 무표정으로 티틀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두 마리의 색채귀들은 너무 멀리 있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두 번째-”
“여기서 죽어라.”
“바… 바이젤루스, 대체 무슨 의미요?”
“저 자식이… 역시 우릴 우롱하려고!!”
“퀴스피드, 슬슬 병력을 퇴각시킬 준비해.”
“티틀 님, 해볼 만 하잖아요! 어서 공격 명령을…”
“싸우다 양쪽 모두 죽을 텐데? 확실하게 마무리 지을 수 없잖아. 원래 재빠른 놈이 느린 놈보다 못하다고. 계획은 순조로워. 천천히 하자고.”
티틀이 웃으면서 퀴스피드를 바라봤다.
“확인함.”
다예람에게 붙어있던 퀴스피드가 땅 밑으로 사라졌다. 그는 뒤로 빠져나가 부하들을 이동시킬 영역을 분산해서 펼치기 시작했다.
“답이 뻔한 질문을 대체 왜 하는 거지? 그러지 말고 나랑 한 판 싸워보자고.”
티틀이 바이젤루스에게 여유롭게 말을 건냈다. 바이젤루스는 무시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선택해라.”
자영은 울음을 멈췄다. 그녀는 긴 소매로 얼굴을 닦으며 차가운 얼굴을 드러냈다. 수 초가 흐르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두 쪽 다 고르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