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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오버진 17화


“으음….”


메어가 눈을 뜨자, 바유와 옅은 이들이 다가왔다. 영문을 모른 채 일어난 그녀는 목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라, 여기는 슐리씨의 방? 아까… 수호자님들이랑 함께 있었는데. 어리님에게 인정받고, 막내로 들어가서…“

“기분 좋은 꿈이었지?“


슐리가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방석 위에 반쯤 누워있던 메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눈을 부스스하게 뜨며 기억을 되짚었다.


“아! 아까까지 대련을…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는데…”

“드디어 정신을 차렸군. 슐리씨가 전했다. 합격이라고.“

“슐리님 사실인가요?!”


바유의 말에 메어의 잠이 확 달아났다. 방금 자다 깬 사람의 것이라곤 상상하기 힘든, 실로 초롱초롱한 눈빛이 슐리를 향해 쏘아졌다.


“맞아, 맞다고! 또 시끄럽게 하지 마. 차근차근 설명해줄게.“


슐리가 반사적으로 질색하며 답하자 메어는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은 합격이야. 이제 수련을 시작해볼까?”

“네! 준비됐어요!“

“자, 첫 번째 수련이야… 여기 뒷동산에 있는 도자기 동굴로 가서…”


팔짱을 낀 슐리가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게 무슨 수련이야!“



메어의 울분이 섞인 외침이 동굴 속에서 울려 퍼졌다. 긴박한 발재간은 숨이 막혀오는 느낌을 들게 했다. 메어의 앞엔, 거대한 원기둥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웅대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메어의 의지색에 비친 동굴 내부의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귀티나는 흙에 유약을 바르고 구운듯한, 빤질거리는 도자기와 같은 윤이 나고 있었다. 주변 모습과 어울리게 그 원통의 몸체도 번듯한 느낌의 광을 내고 있었고, 눈으로 보이는 점 두 개가 중앙즈음에 찍혀있었다. 거대한 원통은 지면 위에 조금 떠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접시 모양의 발 같은 것 두 개가 몸을 지탱하듯 땅에 붙어 있었다.


그의 주위로는 발달린 항아리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메어의 고향 서쪽에도 있었던 ‘도저기‘ 녀석들이었다. 그들의 정수리에 파여있는 구멍에는 여러 가지 과일, 음식, 향신료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거대한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머리 부분에서는 아주 싱그럽고 유난히 달콤한 향이 맴돌고 있었다.


‘그곳엔 도저기들의 왕이라 할만한 녀석이 있어. ’날강통‘이라고 해. 부하들이 훔쳐온 음식 중에서 가장 맛과 품질이 좋은 것을 뽑아 모으는 습성이 있어.‘

‘그렇다는 건요?’

’풍미 좋은 와인을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지! 걱정 마, 그 친구에게 공격성은 없으니까. 건투를 빌어!‘


“바삭하게 구워서 가져갈까 보다!”

“싫어도 해야 하지 않겠나.“

“맞긴 한데…”


메어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날강통에게 수차례의 공격을 시도했다. 온몸을 비틀어가며 무릎차기와 돌려차기를 날렸지만,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열에 강한 것 같은데? 내 번개도 통하지 않아!”

“단단하기도 하군.”


메어와 바유는 날강통에게서 떨어졌다. 그들은 상황을 타개할 비책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타격으론 충격을 줄 수 없어. 내가 힘이 더 강했더라면…”

“저 뚜껑도 들어내야 한다.”


날강통은 도저기들과 달리 내용물을 보호하는 뚜껑을 이고 있었다. 거대한 몸부림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면 꽤 무거운 것 같았다.


메어가 다시 한 번 날강통에게 다가가 어지럽게 뛰어다니며 시선을 빼앗았다. 혼란에 빠진 그는 눈으로 메어를 쫓다가 중심을 잃어 동굴 벽으로 점점 쓰러지기 시작했다. 작고 유약한 메어에게 있어선, 거대한 성벽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메어는 간신히 벽을 밀쳐 다가오는 날강통을 피해 뒤쪽으로 착지했다. 그때 그녀는 무언가 떠오른 듯, 바유와 옅은 이들을 불러모았다.


“얘들아, 모여봐.“


짧은 회의가 오간 뒤, 그들은 전열을 정비하며 태세를 갖췄다. 수신호가 떨어지자, 바유와 옅은 이들은 동굴의 벽 쪽으로 붙어 미끄러지듯 날아가기 시작했다. 날강통이 일어나 정신을 차리던 사이, 그들은 하나둘 위치를 잡아 종유석과 석순 뒤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메어가 온몸에 의지색을 발하며 날강통을 향해 달려나가자, 옅은 이들은 일제히 날강통의 앞에 나타나 번개의 빛을 이리저리 퍼뜨렸다.


당황한 날강통은 뒷걸음질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고, 결국 발을 헛디딘 그는 뒤로 넘어졌다. 녀석이 쓰러진 틈을 타 메어 일행은 그의 이마로 다가가 슐리가 부탁한 재료를 가지러 갔다. 그런데 그의 뚜껑이 제대로 열리지 않고 미세한 틈만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낑낑대며 뚜껑을 열려했지만 드득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날뿐,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윽, 너무 무거워…!”


메어가 주변을 둘러보다 널빤지 모양의 돌을 찾았고, 그것을 지렛대로 써 뚜껑을 열었다. 그제야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고, 동굴은 곧 날강통 안에 있던 향기로운 과일 향으로 감싸졌다.


“왜 심부름을 시킨 지 이해는 가네. 정말 좋은 향이야.”




“잘 구해왔군!“


슐리가 미소를 지으며 메어 일행을 환대했다. 메어가 진이 빠진 얼굴로 쳐다보자,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일개 옅은 이에게 당한 소감은?”

“잠깐, 옅은 이였어요? 아니에요! 전 약하지 않아요. 질투의 색채귀도 이길 수 있다고요!”

“너보고 약하다고 한 적 없다?“


슐리가 눈을 날카롭게 뜨며 킥킥대자, 메어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창피하잖아요…”

“이것도 엄연히 수련이야.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지 알겠지?”

“제게 부족한 것…”

“대련할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어. 넌 감각도 좋고 네 의지색에 대해서도 해박하지만, 중요한 걸 갖고 있지 않아. 신체 요건이지.“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지만…”


메어가 지난 전투들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골로버와 엘도라스. 그가 진정한 힘을 발휘하자, 메어는 반응하지 못한 채 쓰러졌다.


볼비레온. 돌로 된 그의 갑피엔 그녀의 무술은 가려운 수준이었다.


제이 룽. 의지색을 동원했지만, 그녀는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게 바로 네 성장을 막고 있는 주 요인이야. 그래도 의지색이랑 영역의 기초는 자영이 잘 가르쳐놨어. 만약 그게 없었다면 넌 이미 색채귀의 밥이 됐겠지.“


슐리가 과일을 집어 향을 맡으며 말했다. 메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는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자 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역시 네 전신의 근육부터 일깨워주는 게 급선무겠지?“

“네, 좋아요!”

“자, 날 따라와.”

“우리는? 무언가 도울 건 없나?

“아 그렇지. 지금 도울 건 없지만, 때가 되면 같이 훈련하게 될 거야. 일단은 이 친구가 수행하는 걸 지켜봐.”


그렇게 메어 일행은 슐리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1지부에서 나와 북쪽으로 조금 이동했다. 붉고 검은 맨질맨질한 바위들을 지나 다시금 눈쌓인 대지가 펼쳐지며, 차가운 공기가 나무 사이로 휘날리듯 춤추며 다가왔다. 앞에 펼쳐진 풍경은 상당히 이색적이었다. 매섭게 펼쳐진 꼬챙이 모양의 키 큰 나무들은 주먹만 한 굵은 가시를 어여쁘게 달고 있었고, 지면에는 호수가 푸른빛을 내며 광활히 얼어붙어 있었다. 호수의 중간마다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곳에선 빙판 밑에서 헤엄치고 있는 납작한 옅은 이들이 보였다.


“처음은 여기서 시작해보자. 저번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나를 공격해봐.“

“네!”


메어는 초장부터 왼쪽 다리에 의지색을 감으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때 메어가 달려나가던 빙판길이 의지색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에 의해 녹기 시작했다. 곧이어 금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그녀가 발을 딛어야 할 공간까지 다가와 버렸다. 메어는 이를 눈치채고 재빨리 의지색을 거뒀다.


“판단력이 좋군. 이제 진짜 목적을 알려주지.”


메어는 총총걸음으로 얼음판을 거닐기 시작했다. 슐리가 머리카락을 풀며 그녀의 움직임을 쫓아 채찍을 휘두르자, 메어는 바닥에 미끄러지듯이 몸을 날려 그것을 흘렸다. 그러나 더욱 거세고 매서운 공격이 들어올수록, 메어는 차마 회피하지 못하고 채찍에 맞기 시작했다.


“우왓! 따가워… 잠시만요!!!”

“실전에선 따가운 정도로 안 끝나.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공격이라 생각해! 집중해!”


메어는 중심을 잃은 채 빙판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슐리는 머리카락을 뻗어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자, 맞지 않고 10초를 버틸 때까지 계속한다!”







“이걸로 한 시름은 놨지만… 역시 쪽수로는 우리가 너무 불리해.“

“괜찮아요. 상황이 더 나빠지진 않을 겁니다.”


어리의 물음에 씰이 낙천적으로 대답했다. 자영은 이전에 세웠던 작전을 상기하고 있었다.


‘두 얼굴의 후회는 항상 하던 대로 치즈가 맡아. 지쳤기도 했고, 언제든지 빨리 복귀할 수 있어야 해.‘

‘서쪽은 나와 에터가 맡지. 우린 빠르니까, 남쪽에 기습이 들어온다 해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잠깐! 나는? 나는?!‘

’큐 파인드는 북동부로 가줘. 쌍방으로 포위하는 걸 경계해야 해. 마찬가지로 조속히 돌아올 수 있고, 치즈가 도움을 요청하면 합류할 수 있지.‘


“이 싸움이 연막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너무 노골적이에요. 진짜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목표는 누구일지… 확실치 않네. 자영, 아직 너를 포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

“하지만 가능성은 낮아요. 지휘와 사기에 있어서… 저나 어리 씨일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씰, 치즈 쪽 상황은 어때?”




두 얼굴의 후회, 북쪽의 저명한 색채귀. 특이한 습성과 위험성이 맞물려 일찍이 기록되었고, 색의 분노에 준하는 예의주시 대상이다. 평소에는 외딴곳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지만, 불특정한 시기에 사납게 변해 색채들, 심지어 색채귀까지 공격한다.


북쪽에 수호자들의 본진이 있는 만큼, 시간을 확실히 끌 수 있도록 까다로운 그를 선택한 것이었다. 티틀의 도발은 성공적이었고, 두 얼굴의 후회는 모든 영역을 이끌고 본진 코앞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의 몸에서 올라오는 휘발유 같은 지독한 냄새와 불길한 기운은 여타 질투의 색채귀와는 결이 달랐다.


치즈는 화려한 발놀림으로 녀석의 공격을 흘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비상식적으로 늘어나는 몸에서 무한히 쏟아져 나오는, 올리브색 옅은 이들이 치즈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들의 감각을 뒤틀어버려 다가오기 전에 서로 부딪치게 하였다.


회(悔)의 공격은 아주 단순했지만 묵직하고 위협적이었다. 그의 몸에 박혀있는 짙은 초록빛의 돌덩이들은, 같은 부피의 강철보다도 수 배는 무겁고 단단했다. 치즈가 의지색을 이용해 팔의 신경 신호를 조작해도, 그 무시무시한 질량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는 없었다.


녀석의 영역과 치즈의 영역이 부딪히며 어지러운 풍경이 연출되었다. 한쪽은 젤리로 이루어진 꾸물거리는 벽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반대쪽은 중력을 거스르고 위로 흐르는 치즈 폭포가 보였다. 치즈는 두 영역에 솟구친 지형지물을 방패 삼아 전투하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와 많이 싸워온 베테랑이지만, 피로한 전신 때문에 전력을 발휘하지 못해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내 체력이 바닥나겠는걸.“


치즈의 말에 모자렐라가 시시덕거렸다. 그녀는 이를 알아들은 듯 대답했다.


“그래, 시간을 더 지체할 순 없지. 이제 통할 때도 됐어. 죽기 살기로 간다.”


계속되는 물량전과 소모전에 치즈는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두 얼굴의 후회는 지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지만, 꽤 여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치즈가 그를 향해 오른손으로 손가락질하자, 이를 보고 있던 두 얼굴의 후회는 도발로 받아들곤 그녀에게 돌진해왔다. 치즈가 이를 날렵하게 공중제비를 돌며 피한 뒤, 다시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의지색을 발했다. 곧, 녀석은 노란빛의 화약 같은 것에 휩싸였다. 분진들은 정신없는 소리를 내며 타닥거리더니 이내 연쇄적으로 점화되었고, 회는 속수무책으로 폭발에 휘말렸다. 치즈는 꽤 고통스러운 듯 검게 그을려진 오른팔을 떨며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두 얼굴의 후회는 눈을 크게 뜨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윽고 그는 크게 분노한 듯, 팔을 여러 가닥으로 늘려 주변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는 신이 나게 춤을 추며 자신을 놀려대는 여러 명의 치즈가 보이고 있었다.


그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환각 속의 치즈들이 도발하는 위치로 달려나갔다. 수 분 후, 두 얼굴의 후회는 수호자들의 본거지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너무 무리했어. 팔이 불타 들어가는 느낌이야.”


치즈는 본부에 승전보를 올리기 위해 모자렐라를 벗었다.







“티틀 녀석, 직접 찾아오는 건가?.“

“그럴 겁니다. 이제 국지전을 감지할 여유도 없습니다. 이 자리를 지키는 게 지금 최선일 것 같아요. 아, 치즈 씨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씰이 손가락 끝에서 실타래를 뽑아내 두 손에 걸치자, 실들이 떨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어 그녀의 손을 타고 치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씰, 녀석을 물리쳤어.”

“수고하셨어요. 치즈 씨, 빨리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 본거지에서 곧 전면전이 시작될 거예요. 북서쪽에 큐 파인드가 있으니 합류한 뒤 와주시겠어요?”

“알았어. 바로 갈게.”


전화가 끊어지고, 씰의 손가락에 감긴 실타래가 풀리며 모습을 감추었다. 승전보를 들은 어리는 진지한 눈빛으로 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 씰, 준비하자.”

“어리, 나도 도울게.”

“자영, 하지만…”


자영의 말에 어리가 걱정스럽다는 듯 쳐다보며 말하자,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괜찮아, 두렵지 않아. 오랜만에 함께 하게 되네.”

“응… 알았어. 잘해보자고.”

“어리 씨, 자영 씨, 그들이 도착했어요.“


씰의 말을 들은 그들은 일제히 일어나 공격 태세를 갖췄다. 씰은 곧바로 의지색을 이용해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포착된 색채귀는 총 셋. 티틀과 다예람 그리고 사나운 부취입니다.”

“사나운 부취라고? 왜 녀석이 암시장에 있는 거지?”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알았어. 자영은 오른편으로 가, 씰은 왼편으로 가고, 조금 뒤로 빠져있어. 전략은 전적으로 네 판단에 맡길게.“

“네. 알았어요.“




그들이 전열을 정비하고 있는 동안, 티틀과 다예람은 사나운 부취를 이끌고 수호자들의 영역에 다가가고 있었다. 어리의 잿빛 한국화, 씰의 차분한 도시, 자영의 자수정 꽃밭과 같이 생긴 영역이 어우러져, 검푸르면서도 오묘하게 라벤더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대단히 멀끔하네. 여태까지 부하들의 구닥다리 영역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역시 수호자들이야.”

“어머나, 저도 티틀 님의 부하인걸요.“

“너는 딜러잖아? 우리는 동등한 관계에 있다고.”

“어느 분이 무지 화내실 것 같은 말이네요.“


티틀와 다예람은 웃음꽃을 피우며 영역으로 걸어갔다.


“그나저나 티틀 님.”

“응?”

“역시 못 미덥죠?”


다예람이 숨길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티틀은 반 눈을 뜨며 피식했다.


“설마, 일 처리는 잘하는 친구인걸. 별동대는 보험인 거야. 그런 말 하지 말고 이번 작전에나 집중하자고.”

“이런, 정말로 신뢰하시나 보네요.”


티틀의 뒤로 거대한 덩치의 색채귀, 사나운 부취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따라왔다. 녀석은 긴 꼬리를 땅에 질질 끌며 굵은 두 다리와 두 팔로 땅을 짚으며 다녔다. 어두운 갈색을 띄고 있는 근육질의 전신, 날카롭게 뻗은 두 개의 뿔과 이마를 가로지르는 작은 가시들, 무시무시하게 두터운 인상의 얼굴과 이목구비 그리고 거대한 크기의 날개까지. 신화 속에 나오는 도마뱀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고동색 색채 ‘지옥의 조향사‘의 직속 부하. 티틀과의 계약을 통해 암시장에 잠시 들어오게 되었다.


“야, 부취야. 그렇게 등 위에 뭐가 얹혀지는 게 싫어?”

“그렇다.“

“돌아갈 때만큼은 태워줘라?”

“꺼져라.”


소통이 되지 않는 그를 뒤로 하고 딜러들이 의지색을 발하며 출력을 높이자, 두 색의 영역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수호자와 자영의 영역에서는 어두침침한 분위기의 통기타가 재즈의 선율로 연주되기 시작했고, 딜러들과 사나운 부취의 영역에서는 이국적인 느낌의 세 악기가 하나도 어우러지지 않은 채, 불협화음만을 퍼뜨리고 있었다. 이어서 부딪힘의 여파로 땅과 공기가 진동하며 모두의 어깨를 짓눌러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이윽고 양측의 앞을 가로막던 영역의 구조물들은 산산조각이 나며 무너졌고, 그들은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


“어라, 또 만났네 자영. 뭐 하고 있었어?”

“알려줄 리가 없잖아.”


자영의 양손에 자수정 손톱이 가늘게 자라났다. 티틀은 이에 응수하듯 날개를 펼치며 식충들을 불러모았다. 다예람은 신기하다는 듯 씰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호자들의 참모 씰 씨? 신기하게 생기셨네요. 맨날 골방에 틀어박혀 계셔서, 제 몸도 못 가누는 시체 같은 모습을 예상했는데…“

“과한 칭찬이세요. 저는 속 빈 강정이랍니다.”

“씰, 뒤로 가 있어.”


그녀의 전신에 있는 눈이 떠지자, 어리가 걸어나와 씰을 배후에 숨기며 자세를 잡았다.


“참 좋아. 난 누굴 먹어도 상관없걸랑. 어떤 친구가 맛있을까? 거머리, 넌 질퍽질퍽할 것 같고. 털쟁이, 넌 머리카락을 먹는 것 같겠지? 그렇다면 역시…”


자영이 벌레 씹은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히죽거리며 티틀이 말을 이어나갔다.


“쌓인 게 있잖아. 눈치 보일 사람도 없으니…”

“기만자네. 너, 또 무슨 명령을 받고 온 거야? 의지를 꺾는 자가 그렇게도 무서워?”

“그럴 리가 없잖아. 어서 먹어버리고 싶다고. 단지 어떻게 요리할지, 방법을 알아보고 있을 뿐이야.”

“머저리가, 허세만 가득 차 있어. 너의 의지가 그녀에게 묶여 있는 거잖아? 네 힘은 언제건 사라질 수 있다고. 선택권 따윈 없는 꼭두각시가.”


자영이 날이 선 말로 티틀의 귀를 간지럽히자, 그의 웃음이 사라지며 목소리에 구름이 끼었다.


“지루한 대화는 그만하자고.”



그의 말이 끝나자, 사나운 부취가 맹렬히 포효하며 달려나갔다. 어리가 손짓을 하자, 손 주변의 허공에 검은 액체가 퍼지며, 무언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검은 물이 서서히 형태를 잡아가더니, 어느새 붓 한 필이 되어 그의 손에 들렸다. 그리고 검은빛의 영역이 퍼져 나가더니, 그의 주위로 거머리 형상의 옅은 이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방어는 맡겨줘. 다들 준비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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