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멋지게 해냈네!“
“10초가 10분 같았어요…”
제1지부로 돌아온 그들은 돌 탁자를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작은 연회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처 불타지 않은 가구들을 정리하고, 나무로 벽과 지붕을 올려 막집을 올렸다. 바깥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이 목탄에 붙어 있었다. 연회장은 날림으로 지은 폐가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따듯한 공기와 은은한 붉은빛을 받아, 한껏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슐리는 메어는 바유에게 음료수를 권했다. 그 검보라색의 물에선 오묘하게 시큼한 냄새가 났다. 과일을 껍질째로 설탕과 물에 졸여 뜨겁게 달인 것이었다. 분명 좋은 향이었지만, 메어는 그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으… 뭔가 어지러워요. 마시면 큰일 날 것 같은데…”
“나는 됐다. 이런 걸 즐기진 않거든.”
“조금이라도 먹어. 이렇게 좋은 과일은 찾기 힘들다고?“
슐리가 탁자에 놓인 과일들을 집어 그들의 앞에 갖다 놓았다. 바유는 마지 못해 작은 과일 하나를 들어 입에 가져가 넣었다. 그는 꽤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맛있군.”
“거 봐!”
슐리가 웃으며 머리를 예리하게 풀어헤친 뒤, 커다란 과일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메어는 가장 작게 잘린 반달 모양의 과육을 집었다.
“예전 생각이 나네요… 그때는 제가 권하는 처지였는데…“
“자영 얘기야?”
메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슐리가 과일을 베어 물며 얘기에 끼어들자, 메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라면 너랑 상극이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잘 이끌어주었군. 네겐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힘이 있거든. 자영도 그거에 울림을 받았으려나?“
“고마워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이 몸이 보증하지. 자, 오늘은 잔뜩 놀자고!“
슐리가 웃으며 과일을 들자, 모두 즐거운 마음이 되어 연회를 이어나갔다. 새벽색이 선명히 하늘을 뒤덮을 때가 되어서야, 연회는 고개를 숙이고 한적함을 맞이했다. 그들은 다시 지하의 방으로 이동해 잠을 청했다.
다음날에도 그들은 연회장에 모여 앉았다. 슐리는 탁자의 끄트머리에서 메어와 바유 일행을 향해 말했다.
“오늘부터 다시 수련에 나설 거야. 목표를 자세하게 말해주지.
첫 번째, 빙판 위의 대련에서 맞지 않고 1분을 버티는 것.
두 번째, 외부의 도움 없이 의지색을 발사할 것.”
“좋아요! 바로 시작하죠!”
“잠깐, 세 번째. 이게 가장 중요해.”
메어가 어리둥절해하자 슐리가 웃으면서 바깥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메어가 그쪽을 바라보자, 어두운 붉은빛에 검고 맨질맨질한 질감의 거대한 바위들이 이리저리 서 있었다. 가장 작은 것도 메어의 키보다 두세 배는 되어 보였다.
“저 바위들은… 왜요?”
“저걸 부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기술을 만들 거야. 그 전의 수련은 이걸 위한 밑작업인 셈이지.”
“금이라도 가면 다행인데…”
“앞에 말한 수행들을 끝내고 나면 충분히 가능할걸? 자, 바로 호수로 가자고.”
호수에서의 대련은 지난번보다도 더욱 거셌다. 메어는 3초도 버티지 못하고 슐리가 휘두른 머리카락에 맞고 있었다.
4초, 5초, 6초…
메어의 눈이 점점 적응해갈 무렵, 슐리는 더 빠르게 촉수를 놀렸다. 메어는 화들짝 놀라 온몸을 낑낑대며 틀었지만, 속수무책으로 구타당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러, 메어는 완전히 탈진해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불… 가능해요 이건 단기간에 되는 게… 윽?!”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하던 그때, 메어의 팔을 향해 작은 가시 하나가 날아와 박혔다.
“이건… 어라?”
메어의 눈앞이 갑자기 희뿌예졌다. 비눗방울을 닮은 오색의 구체들이 거품처럼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심장 박동과 함께 전신의 신경이 저릿거리며 몸속에 있던 고통이 가시더니, 이어 머리가 맑아지며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뭐지? 하나도 안 아파…? 기운이 팔팔해…!”
메어는 제자리에서 높게 뛰고 팔을 붕붕 돌렸다. 그녀의 몸은 멋진 휴양지에서 마음껏 놀고 쉬고 온 것 같이 가벼웠고, 눈은 동굴에서도 빛을 낼 것처럼 밝았다.
“이 몸의 의지색이야. 내 영역을 몸에 흘려 넣어서 꿈을 전달할 수 있지. 너에게 무서운 괴물이 나오는 악몽을 보여줘 공포에 떨게 할 수도 있고, 달콤한 과자를 먹는 꿈을 보여줘 기분 좋게 만들 수 있어.”
“지금은요?”
“너가 깊은 잠에 편안히 빠지는 꿈을 보여줬지. 하지만 의지색의 위력을 높이려면 더 많은 영역을 써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 방금 내 어깨가 좀 뻐근해졌네.”
“대단해요…!”
“자, 휴식이 끝났으니 바로 이어서 하자고!”
슐리의 능력에 힘입어 수련은 파죽지세로 진행되었다. 며칠을 밤낮없이 고생해야 얻을 경험을 메어는 단 몇 시간 만에 습득하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과 동체 시력, 반응 속도는 실시간으로 더욱 예리하고 정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10초, 13초, 16초…
슐리가 강도를 조금씩 올릴 때마다, 적응하지 못한 메어는 몇 초도 버티지 못한 채 고꾸라졌지만, 이내 무서운 속도로 회복하고 전보다 더 오랫동안 버티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가 20초를 버티는 데에 성공했을 때, 슐리는 머리카락을 거두며 손뼉을 쳤다.
“브라보! 정말 잘했어. 하루 만에 이 정도라니. 어제보다 더 힘든 훈련이었는데, 두 배를 버텼잖아? 고무적이네.”
“슐리씨 덕분이에요…”
메어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빙판 위에 쓰러졌다.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던 바유와 옅은 이들이 그녀에게 다가가자, 슐리가 머리카락을 뻗어 그녀를 감싸 일으켜 세웠다.
“내일은 30초를 목표로 하자고. 내 능력으로 푹 쉬게 해줄 테니, 아침부터 시작한다?”
“네! 그런데 슐리씨…“
“응? 왜?”
“이거 가시를 계속 맞다간… 고슴도치가 되어버릴 것 같아요.”
“아, 미안. 앞으론 내 손으로 해줄게.”

훈련은 계속되었다. 다음날 점심이 채 되기도 전에, 그녀는 목표치인 30초를 버티는 데 성공했다. 자신감을 얻은 메어는 더욱 열심히 수련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슐리는 자신의 능력을 우쭐대며 칭찬하면서도, 그녀의 투지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열정적으로 몰입하며 가르쳤다.
대련을 시작한 지 이틀하고 8시간, 메어는 끝내 1분을 버텨냈다. 고된 훈련의 끝에 항상 무릎을 꿇고 쓰러지던 그녀가 이번에는 두 발로 서, 자신의 성장을 땀과 함께 만끽했다. 슐리는 그런 메어를 보며 만족한 듯 웃음을 내보였다.
슐리와 메어, 그리고 바유와 옅은 이들은 지하로 돌아가서 편히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네 전략을 쓸 수 있는 폭이 넓어졌을 거야. 몸이 따라오니까 더 많은 경우의 수를 창출할 수 있겠지. 다음 수련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문제 하나를 내볼까? 너, 의지색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의지색은… 영역을 사용하는 초능력이죠?”
“그렇다면 강한 의지색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많은 영역을 쓰는 것…?”
“다음!”
“수련해서 효율을…”
“다음!
“어…”
“강한 의지를 갖출 것, 더 나아가서 의지와 몸이 완벽히 동조될 것.”
메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반눈을 뜨며 머리를 긁었다. 슐리는 흔들의자 쪽으로 걸어가 그것을 등지고 말했다.
“두 가지 길이 있어. 의지에 잡아먹히거나, 의지를 제어하거나. 전자는 주로 색채귀들이, 후자는 우리 같은 색채들이 갈구하는 방식이지. 어느 쪽이 되었건 더 높은 위력의 의지색을 사용할 수 있게 돼. 영역과 수의 싸움을 넘어, 의지의 싸움을 하는 거지.”
“정신력이라고 볼 수 있는 거네요.”
“그렇지. 네 당당한 의지가 만용이 될 수도, 불굴의 투지가 될 수도 있어. 그런데 너무 재미없는 얘기였나? 너라면 말이지…”
슐리가 그녀를 힐끗 쳐다보자, 메어는 누구보다도 굳건하고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당당히 웃으며 말했다.
“항상 해왔던 거죠.”
슐리는 눈을 감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다음 수련으로 넘어가 볼까? 첫 번째 수련에서는 너의 반사신경을 향상했어. 덤으로 네 몸에 가해진 부하로 근육들이 자극되고 재생되면서, 부족한 근력도 늘어났을 거야. 그렇다면 이제 영역과 의지색을 깎을 때가 된 거지.“
슐리가 머리 쪽의 촉수를 돌돌 말자, 그 끝에서 가느다란 침 하나가 모습을 보였다. 그 침은 검지보다 아주 약간 얇았고, 한두 마디 정도 더 길었으며, 뜨개질에서 쓰이는 거대한 바늘을 연상케 했다. 그녀는 그것을 들고 메어에게 다가가더니, 바늘의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응? 거기에 뭔가 있나요?”
“자세히 봐봐.”
슐리가 가리킨 곳을 보자, 세로로 긴 아주 작은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대략 가로길이 삼 분의 일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고, 위에서 쬐어오는 광원이 없었다면 안 보일 만큼 작았다.
“작은 틈이 보여요.”
“이 바늘을 5미터 뒤에 둘 거야. 그리고 이걸 향해서 의지색을 쏘는 거지, 얇게 말이야. 구멍을 관통하면 통과! 이번에도 될 때까지 할 거야.“
“네, 해볼게요!”
“맘에 들어. 그 주저하지 않는 의지. 자, 메어는 준비가 됐어. 너희들!”
“엇, 무슨 일인가?”
“너희가 연습할 때가 왔어. 메어한테 의지색을 나눠 받아. 바유를 중심으로 의지색을 다루는 데에 더 익숙해지도록, 자유롭게 연습해봐. 지치거나 모르겠으면 이 몸이 도와주지.”
“알겠다.”
두 번째 수행은 첫걸음부터 아주 고되었다. 그녀의 정밀함은 초보 수준에 불과했다. 더욱 예리해져야만 의지색을 방출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저 바늘구멍을 꿰뚫을 수 있을 것이다. 자영에게서 배웠던 기본기에 슐리의 냉철한 교정이 더해지며, 그녀의 영역은 첨단하게 연마되어갔다. 쭈글쭈글하게 메어의 몸을 감싸던 가지색 번개는, 이틀에 걸쳐 멋들어지게 위로 솟구치는 모습으로 변화했다.
그녀가 지치고 쓰러질 때마다, 슐리의 의지색이 빛을 발했다. 그렇게 원래라면 달 단위가 걸렸을 일정을 메어는 단 사흘 만에 주파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당당함과 거침없음의 덕도 컸다. 힘들거나 어렵거나,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메어는 꿋꿋이 수련을 택했다.
한편 바유는 메어의 강해진 의지색을 받아 옅은 이들을 차례대로 감응시키며 그 감각에 더욱 익숙해지고 있었다. 더 첨예해진 의지색을 몸에 담자, 그들은 몸이 가벼워진 듯 하지 못했던 움직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바유와 옅은 이들의 능률은 성장한 메어의 능력에 맞춰 한 단계 더 진보하고 있었다.
수련이 시작된 지 나흘째. 메어는 드디어 옅은 이들의 도움 없이 의지색을 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2미터가 한계였지만, 크나큰 발전이었다. 바유와 메어는 서로의 수련을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 되어가고 있어?”
모래빛을 내고 있는 작은 딱정벌레 하나가 누군가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것에서 드득거리는 잡음과 벌레의 날갯짓이 섞인, 티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이다.”
“…”
“정확히 22시간 뒤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아주 굵직하고 내려앉는 듯한 저음과 입술 사이로 공기가 스며나가는 소리를 뚫으며, 옹졸하면서도 지적인 느낌이 드는 목소리가 났다. 나무의 그림자와 하늘의 새벽색이 겹쳐 그 모습을 가리고 있었는데, 백지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은 그 형태를 희미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머리가 있을 법한 위치에는 거대한 귀 두 장과 길게 뻗은 창과 같은 것이 보였고,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몸 전반에 걸쳐 있었다. 그런데 세 목소리가 들려왔는데도 복잡한 그림자 하나만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블루벌리의 얘기는 들었어. 그 녀석 살아있다고.”
“유감스럽군요. 제이 룽씨의 뒤처리가 이렇게 어수선해서야.”
“뭐 괜찮아.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거든. 잘 해봐. 혹시 모르지, 퀴스피드 대신에 너희가 딜러가 될지.”
“좋습니다.”
“팔다리는 잘라도 좋아. 오붓한 대화만 나눌 수 있으면 돼.”
“알겠습니다. 아, 블루벌리에게는 방금 복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럼, 추후 연락드리겠습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티틀과의 교신이 끊어지며 송신기 딱정벌레가 유유히 머리카락으로 날아와 앉았다. 곧이어 그 너저분한 형체의 무언가가 입김을 내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는데, 예람?”
“이런, 늦어버렸네요. 용서해주시길.”
“괜찮아. 목표는 달성했잖아? 이걸 보면 절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티틀과 다예람이 웃는 얼굴로 사나운 부취를 앞세워 백지를 거닐고 있었다. 부취의 질질 끌리는 꼬리가 땅에 맞닿으며 부스스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 꼬리 끝에는 철저히 짓밟혀 망가진 누군가가 묶여 있었다. 그는 일말의 저항도 하지 않았고, 끽하는 목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자, 어서 가자고. 청록색 털쟁이.“
수련이 시작된 지 닷새째, 새벽색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메어, 바유와 옅은 이들은 여느 때와 같이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준비 운동을 하고 있었다. 메어가 호수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달리면, 바유와 옅은 이들은 그 뒤를 졸졸 따라 날아왔다.
“열… 다섯 바퀴…! 끝!”
“어제처럼 해가 뜨기 전에 마무리했군.”
“그럼 남은 시간 동안 쏘는 연습을 해볼까?”
숲을 뒤로하고 호수를 바라보던 메어는, 의지색을 서서히 내뿜으며 활시위를 당기는 자세를 했다. 그녀의 전완부부터 손끝이 가짓빛의 번개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주변을 삼키는 소리와 망막을 태워버릴 것 같은 빛을 발산하던, 지저분한 번개는 없었다. 그녀의 팔은 차분하고 평온한 선율의 기타 줄 당기는 소리와, 고요한 불빛에 휘감겨 있었다. 그 모습 역시 세련되게 정돈되어, 휘날리는 깃발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이어 메어는 호수가 펼쳐진 곳을 향해 번개로 된 화살을 쏘았다. 깃과 촉이 살아있는 상태로 그것은 한 뼘, 두 뼘, 세 뼘까지 날아갔다. 하지만 여섯 뼘이 넘어갔을 즈음 머리와 꼬리의 형상이 불안정해졌고, 아홉 뼘이 넘어갔을 땐 대가 잘려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화살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진 지점은 메어의 손끝으로부터 대략 2미터하고 50센치 정도였다.
“음… 아직 부족해. 자, 그럼 오늘도 힘차게 달려봐야지!”
몇 번의 활쏘기 연습이 끝나고, 그들이 제1지부로 발걸음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툭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메어의 주변에 있던 나무들이 슬며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미묘하게 원음에서 벗어난 음들이 점점 커지며 삐걱대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그 발걸음은 앗아간다, 유린한다, 파괴한다고, 암묵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메어가 느껴보지 못했던 색다르고 소름 끼치는 기운이었다. 발걸음은 한 곳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었다. 메어의 앞, 왼쪽, 오른쪽에서 동시에 들려왔다. 그 무서운 합창은 메어의 머리카락을 너저분히 휘날리게 했다.
이윽고, 메어의 앞에 있는 땅이 상아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구겨진 골판지가 서서히 펼쳐지는 모습과 같이, 영역의 바닥이 백지를 먹고 켜켜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 질감은 찰흙과 유사했지만, 입자 하나하나는 모래알과 같이 작았다. 그 위로는 크고 작은 생명체들의 턱뼈가 박히고 있었다. 각각의 턱뼈에는 삐죽거리는 치열의 덧니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무엇이든 깨물어 부수기 위해 태어난 괴물의 턱같이, 기형적이고 비정상적이었다.
드디어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얼굴을 보인 것은 메어의 오른쪽에 있는 뱀이었다. 메어를 한입에 넣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큰 턱을 갖고 있었고, 그 몸뚱어리의 길이는 족히 10미터가 넘어 보였다. 예리하고 얇은 송곳니는 위화감있게도 섬세하게 연마되어, 잘못 꽂는다면 부러질 것만 같았다.
다음은 메어의 왼쪽에서 털북숭이의 거구가 모습을 보였다. 그는 두 다리로 서 있으면서도 두 팔을 땅에 짚고 있었다. 가슴에 붙은 거대한 크기의 근육만 하더라도 메어의 얼굴만큼 컸다. 두 발로 섰다면 족히 5미터는 되었을 것이다. 우람한 풍채의 녀석이 땅을 움켜쥐며 숨을 들이쉬자, 메어의 앞에서 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
녀석의 키는 메어가 이전에 만났던 레빙의 본체 정도였지만, 그는 신장에 맞지 않을 정도로 긴 창 하나를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창끝은 코끼리의 형상을 한 몸체이자 방패가 달려 있었고, 그 앞으로는 예리하게 조각된 상아 두 개가 웅장하게 뻗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짐승의 체취를 풍기고 있었다. 더러우면서도 상쾌하며, 가공되지 않은 생고기의 냄새 같았다. 그들은 모두 빳빳한 질감의 하얀 털이 달린, 가죽 같은 것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거구가 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위로 퍼지며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메어를 주시하고 있었다. 뱀 역시 혀를 내뱉고 삼키며 메어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작은 쥐는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나오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암시장에서 명을 받고 왔습니다.”
“너 꽤 예의 바른걸. 당당히 와서 먼저 인사를 건네다니.”
“여러분도 침착하시네요. 우린 어쩌면 대화가 통할지도 모르겠군요.”
작은 쥐가 왼손으로 수염을 가다듬자, 메어는 살짝 땀을 흘리며 입을 떼었다.
“뭘 원해?“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싸움은 체력만을 낭비할 뿐입니다. 티틀님이 직접 대화를 나누고 싶다 하셨습니다.“
“…장난해? 걔는 나랑 내 친구이자 스승님을 해치고 죽이려 했어.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다고?”
“지나간 일은 잊으십시오. 그리고 저항하지 마십시오. 큰 화를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싫다고 하면?”
“문답무용이군요.“
상아색과 가지색의 영역이 서로 부딪쳤다. 적들의 영역에서는 나무로 된 판을 끝이 동그란 채로 두들기는, 통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작은 쥐는 창을 빼 들더니 양손으로 고쳐 잡은 뒤 메어를 향해 돌격했다. 발소리조차 거의 나지 않는 가벼운 몸이 무색하게, 육중하고 서슬 퍼런 찌르기가 메어의 흉부를 향해 들어왔다. 그녀는 창이 대기를 가르며 내는 소리를 듣고 그 작은 쥐의 실력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속도가… 그 악어녀석에 버금가는 것 같아.‘
메어는 침착하게 창의 궤도를 파악하며 몸을 놀렸다. 전과 달리 그녀는 절제되고 간소화된 움직임으로 공격을 흘려냈다. 정신없는 와중 왼편에서 털북숭이의 거구가 쿵쿵대며 달려와 메어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꽂아넣었고, 그대로 적중하는 듯 보였다.
그때 메어는 발을 90도로 들어 올려 정권을 막아낸 뒤, 그대로 발을 내질러 작은 쥐를 향해 거구를 걷어찼다. 녀석은 작은 쥐가 자신에게 휩쓸리기 전에 두 발을 땅에 박아 속도를 줄였다. 그렇게 시야가 어지러워진 사이 오른편에 있던 뱀이 메어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양동작전을 펼치려던 모양새였지만, 녀석은 뒤를 돌아보고 있던 옅은 이들에게 발각되어버렸다. 그녀는 바로 몸을 돌려 뱀의 꼬리를 잡아 의지색을 감응시킨 뒤, 밧줄처럼 쥐와 거구가 있는 곳으로 던졌다. 둘은 뱀에게 맞기 전에 간격을 벌렸지만, 더욱 강해진 메어의 의지색은 그들까지 감전시켰다. 뱀이 땅으로 떨어지자, 그의 송곳니가 저항 없이 땅을 가르고 꺼졌다.
‘저건 닿기만 해도 베이겠는걸.’
공격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뱀이 날아가던 사이, 그리고 나머지 둘에게 의지색이 분산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메어가 다음 수를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벌어주었다. 녀석들의 몸이 마비되고 시야가 먼 사이, 그녀는 작은 쥐에게 다가가 그의 코끼리 창을 걷어 차 호수 쪽으로 날려버렸다. 정신을 차린 그들은 무기를 잃은 쥐를 보호하기 위해 그를 배후에 숨긴 뒤, 메어가 거리를 벌리도록 공격을 계속해서 쏟아냈다. 메어 일행이 얼어붙은 호수 쪽으로 물러나자, 뱀이 몸을 일으킨 뒤 쥐의 꼬리를 입술로 잡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머리를 풍차 돌리듯 회전시키다가 메어를 향해 작은 쥐를 던져버렸다.
“저 녀석 갑자기 무슨 짓이야?!”
어이가 없었던 메어는 본능에 따라 고개를 숙여 날아오는 쥐를 피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노림수. 쥐는 메어의 뒤에 꽂혀있던 창을 다시 집은 뒤, 메어의 다리를 베면서 동료에게 복귀했다.
“윽!”
“괜찮나 메어?”
“이 정도면 괜찮아.“
메어는 다리 쪽에 의지색을 발해 열로 상처를 지진 뒤, 그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뱀은 특이한 형상으로 그 거구의 몸을 감고 있었다. 그의 오른팔을 향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뒤, 왼팔과 허리를 지지대로 삼고 있었다. 작은 쥐가 그들에게 합류하자, 거구는 허리와 목을 숙였다. 쥐는 마치 말을 타는 것처럼 거구의 몸 위로 올라가 창을 휘둘러 메어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군요.”
그말과 함께 떠오르는 태양이 그들을 등지고 빛을 쬐기 시작했다. 셋이 얼기설기 뭉친 그 모습은 그림자 속에서 하나가 되어 기괴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각자무치. 뿔이 있는 짐승에게는 이빨이 없다. 완벽한 색채는 없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다.”
쥐와 거구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듯 얘기했다. 거구가 말을 끝마치자 작은 쥐는 창을 두 바퀴 돌린 뒤 메어를 향해 겨눴다.
“날쌔게 바람이 불고 벼락이 치니, 시궁쥐는 풍치전체의 앞니.
석자의 칼날, 구렁이는 삼척장검의 송곳니.
우리의 입김은 미물에도 가차 없으니, 야만인은 사승습장의 어금니.”
“우리는… 네 개의 이빨이다.”
구호가 끝나자 그들, 아니 그것은 본격적으로 살기를 내뿜었다. 네 개의 이빨이 창을 치켜세우며 오른팔로 땅을 갈았다. 그것의 여섯 개의 눈이 메어를 응시하며, 카랑카랑한 합창을 하며 달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