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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오버진 19화


네 개의 이빨이 달려오기 시작하자, 메어는 몸을 숙인 채 그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의 발이 땅을 벗어나 얼어붙은 호수에 안착하던 그때, 메어는 양 발바닥에서 의지색을 내뿜었다. 그 번개는 아담하고 약해 보였지만, 고압으로 발사되는 물기둥과 같이 거세고 뾰족했다. 특유의 찢어지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숨소리와 발소리에도 묻힐 만큼 작고 고요했다.


메어는 네 개의 이빨이 접근할 때마다 점점 왼쪽으로 이동하며, 반시계방향으로 큰 원을 그렸다. 그녀의 양쪽 다리는 조용한 절단기가 되어 얼음을 오려내기 시작했다. 한 바퀴하고 반을 돌았을 때 메어는 땅을 밟았고, 녀석은 호수 위에 서게 되었다.



그녀는 원형으로 깎인 빙판을 오른손 주먹으로 가격해, 순식간에 완파시켰다. 네 개의 이빨이 작전을 눈치챘을 때엔, 이미 전후좌우의 발판이 살얼음처럼 갈리고 녹아 부서져 있었다. 메어는 이 틈을 타 제1지부로 발을 돌렸다.


“유리한 환경을 선점하는 거군.”

“맞아. 만에 하나 내가 잘못된다면, 바로 슐리씨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해줘.“

“알았다. 그런데…”

“…나도 느끼고 있어.”


메어가 숲에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상아색의 영역이 충돌했다.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오고 있다. 메어가 오른팔을 앞으로 뻗는 동작을 하자, 옅은 이들이 이에 맞춰 손 앞에 일렬로 섰다. 이윽고 그녀의 앞에 먹이를 쫓듯 파도치며 날아오는 뱀이 나타났다.



그녀는 그를 정조준한 뒤, 전보다 더욱 거대해진 가짓빛의 화살을 빚어 그에게 쏘았다. 그때 녀석이 순간적으로 꼬리를 말더니, 자신의 옆으로 스쳐지나가던 나무를 붙잡고 멈춰섰다. 메어가 화들짝 놀라며 녀석을 찾으려 했을 때엔, 그는 이미 숲 속으로 도망가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영역이 감싸지고 있군.”

“벌써 호수를 빠져나와서 여기까지 온 거야. 점점 조여오고 있어. 평야를 찾아야 해.”


포위망이 좁혀온다. 이 좁은 곳은 메어 일행에게 너무 불리했다. 그들은 최대한 장애물이 없는 곳으로 천천히 이동한 뒤, 옅은 이들을 사방으로 배치한 뒤 때를 기다렸다. 자리잡은 평야는 꽤 큰 연못만큼 넓었다.


곧, 메어의 후방으로 창을 든 쥐가 먼저 모습을 보였다. 메어는 바로 배후에 있던 옅은 이에게 의지색을 감응시킨 뒤, 그의 시선을 빼앗고 발에 의지색을 감아 달려나갔다. 하지만 그 찰나에 뱀이 아코디언처럼 몸을 늘어뜨려 쥐의 시야를 보호했다.



동시다발로 메어의 등을 노리고 거구가 달려와 망치로 못을 박듯 주먹을 날렸다. 바유와 다른 옅은 이들이 거구에게 번개를 감응시켜 저지해보려 했지만, 그들의 힘은 그의 의지에 비해 너무나도 미약했다. 거구의 주먹이 그저 스치기만 했을 뿐이었는데도, 그녀는 야구방망이에 맞은 공처럼 붕 뜨게 되었다.


일순간, 그녀는 창끝에 달린 상아를 잡으려 시도했으나, 그새 뱀은 체중을 이용해 창을 휘감아 그 손을 뿌리쳤다. 무력하게 날아가던 메어는 다시 천천히 바닥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밑에선 그녀를 확실하게 제압하기 위한 진형을 짜고 있었다. 그 순간 메어가 손을 뒤로 빼 수신호를 주자, 바유와 옅은 이들이 빠르게 날아와 떨어지는 그녀를 낚아챘다. 낙하산처럼 느리게 떨어지는 그들은 이윽고 왼 다리를 앞으로 뺀 투창 자세를 한 쥐를 보았다.



“지금이야, 붙잡아.“


메어가 소곤거리자, 바유와 옅은 이들은 서로 부여잡아 그녀의 밑에 작은 폭의 구름 같은 발판을 하나 만들었다. 이윽고 쥐의 손에서 벗어난 창이 작은 화살을 웃도는 빠르기로 맹렬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메어가 발판에 발을 딛고 오른손을 뻗자, 옅은 이들은 순간적으로 고도를 낮췄다. 메어의 얼굴을 노리던 창은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고, 그녀는 미리 뻗어놓은 오른손으로 그것을 잡은 뒤, 무릎으로 걷어차 창을 부러뜨렸다. 메어는 당황한 쥐에게 창의 파편을 던져 시야를 가렸다.



그리곤 떨어지면서 돌려차기를 날려, 그를 얼어붙은 호수가 있는 방향으로 날려버렸다. 쥐는 제 발로 도망치는 것처럼 빠르게 전장을 이탈했다. 그녀의 두 발이 땅에 닿자 미리 똬리를 틀어놓은 뱀이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위로 빠져나가려 시도했을 때엔 이미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으니, 거구가 뛰어와 메어 일행을 짓뭉개려 하고 있었다.


사면초가의 상황. 그녀는 눈을 굴리며 가장 넓은 틈을 찾더니, 두 손에 의지색을 날처럼 세운 뒤 뱀의 몸을 일부 도려내며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악쓰는 소리와 함께 뱀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물 흐르듯 거구에게 돌아가 몸을 천천히 둘둘 대며 감았다. 바유와 옅은 이들은 바로 메어에게 복귀해 그들과 대치했다. 뱀과 거구는 천천히 뛰는 심장처럼 서서히 물러난 뒤, 호수를 등지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되지 않아 호수 쪽에서 쥐가 빠르게 달려오더니, 다시 거구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아까 그건, 우리 대원의 의지색…? 당신 정체가 뭐죠?“

“따라 했을 뿐이야.”

“티틀 씨가 왜 관심을 두는지 알겠습니다. 당신은 위험합니다. 존재 자체가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쥐의 간사한 목소리가 험악해지자, 뱀과 거구 역시 눈을 시퍼렇게 뜨며 주변에 무거운 악취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무언가를 더 숨기고 있다. 그렇게 생각한 메어는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자세를 낮췄다. 오른 다리에 의지색이 감기자, 네 개의 이빨은 전보다 더욱 중후하고 날쌔게 질주해왔다. 설렁설렁 달리던 선수가 다리를 곤두세우고 진심으로 임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메어는 뻗어오는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빗겨내며 그 몸부림에 적응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정형화할 수 없었다. 매번 조금씩 다른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는 거구의 몸통지르기. 거친 바람에 온몸을 맡긴 것처럼 기이하게 구불거리는 뱀.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메우는 쥐의 간사한 물기.



그때 메어는 과거의 대련을 복기하며 슐리의 움직임, 네 개의 이빨의 움직임을 겹쳐서 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예측할 수 없다면 비슷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따라 한다. 그 선풍기에 달린 비닐처럼 어지러운 공격을 메어는 천천히 적응했고, 그다음 수를 생각할 여유를 만들었다. 순간 틈을 잡아챈 메어는 왼발을 뒤로 박찬 뒤, 진 땅을 갈며 뒤로 거세게 물러났다.


“이거 참 거칠군요…!!! 큭!”


이윽고 짙은 회색빛의 더러운 눈 알갱이들이 폭죽처럼 일어나며 그들의 시야를 따갑게 방해했고, 네 개의 이빨은 공격을 멈추고 그것을 털어냈다. 흐름이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메어가 거구를 노려 의지색을 감은 발차기를 준비했다. 산미치광이를 연상시키는 자잘한 번개는 전보다 방대한 영역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두 발로 땅을 박찬 뒤 일렉기타를 조율하는 소리와 함께 거구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곤 의지색이 울부짖는 왼 다리를, 정신을 막 차린 거구의 턱을 향해 가감 없이 쏘아냈다. 이 일련의 일들은 초침이 대략 두세 번 움직이는 동안 벼락같이 흘러갔다.


거구는 빠르게 두 팔로 십자를 만든 뒤 발차기를 막았다. 그는 당연히 이 정도 발차기는, 힘으로 밀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예상을 뛰어넘고, 고양이의 울음소리 같은 앙칼진 번개의 아우성과 함께 거구는 공중으로 크게 밀려났다. 키의 두 배에 달하는 높이에 뜨다니, 그는 인생에 있을 수 없었던 진귀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런 잡생각도 잠시, 그의 팔은 어느새 불에 휩싸인 수준으로 달궈져 있었다. 번개가 내뿜는 초고열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이를 보자마자 팔을 볼품없이 퍼덕이더니, 결국 자세를 잡지 못하고 머리부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엄청난 중량은 자신의 두부를 완전히 땅에 박히게 하였다. 거구는 엉덩이가 하늘에 들린 상태에, 다리는 90도로 가지런히 꺾인 웃긴 모습으로 퍼질러졌다.


“과연, 놀라운 힘이네요. 블루벌리가 질만 했어… 이 정도면 제이 룽 씨도 힘 좀 쓰셨겠군요.”



거구를 날리고 뒤로 물러나던 메어의 앞에, 쥐가 긴 나뭇가지를 들고 뛰어들어 그것을 위협적으로 놀렸다. 메어가 땅에 발을 딛자마자, 쥐는 그 나뭇가지를 봉으로 써 흡사 돌팔매질과 같이 빠르고 묵직한 봉술을 펼쳤다. 왼쪽 옆구리를 향한 매서운 찌르기. 오른쪽 다리 끝부터 턱까지 닿는 휘두르기. 메어는 두 다리를 이용해 경합을 주고받았다. 다리가 따라오지 않을 땐 팔꿈치와 손목을 이용해 궤도를 틀어냈다.




메어는 쥐에게서 벗어나 점점 뒷걸음질쳤고, 그 역시 거구를 보호하기 위해 후퇴했다. 일찌감치 뱀은 바닥에 박힌 거구를 온몸으로 감싸 뽑아냈고, 거구는 다시 네 발로 땅을 딛으며 전신에 묻은 먼지를 몸을 뒤흔들며 털어내고 있었다. 대치 상황 속, 메어는 제1지부까지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부에서 북쪽에 있는 호수에서부터 난전을 시작해 남쪽으로 이동해왔다. 현재 위치에서 목적지는 약 1km 떨어져 있었다. 도망치기엔 너무나도 멀었고, 불리한 환경이었다.


“망치의 토룡… 그 정도인가…”

“그게 뭐야?”

“제 오랜 친우입니다. 물건이 아닙니다.”


거구와 쥐가 슬그머니 뒤로 가자, 뱀이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메어를 위협하며 다가왔다. 지렁이같이 유유하게 움직이던 녀석은, 늘어났다 퉁겨지는 고무줄과 같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메어가 뒤를 지키고 있던 옅은 이들에게 엄지를 들자, 그들은 바유를 중심으로 날개를 펼치듯 양옆으로 진을 쳤다.


어느덧 뱀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는 입을 일자가 되도록 크게 벌리더니 목을 날렸다. 메어가 허리를 숙이며 그의 턱밑으로 몸을 낮췄지만, 그의 송곳니의 손아귀를 완벽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정말 약하게, 마치 화장품을 바르듯 톡 닿았음에도, 메어의 손등에 있던 살갗이 베여 선명한 피를 보였다.


곧바로 뱀은 그녀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몸을 틀어 회오리쳤다. 작은 훌라후프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만을 남겨놓고, 그는 머리를 똬리의 안쪽으로 넣어 그녀를 집어삼키려 시도했다.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드는 그 입을 향해, 메어는 의지색을 강하게 발사했다.



새총탄처럼 같이 날아간 가짓빛 번개는 그의 구내를 환하게 비추었고, 이어서 얇디 얇은 입천장과 벽을 무차별적으로 태워버렸다. 뱀이 크게 몸부림칠 때, 진을 치고 있던 바유와 옅은 이들이 그에게로 달려들었고, 이어 메어가 전신에 의지색을 뿜어 옅은 이들을 감응시켰다.


전신을 태워버릴 것 같은 고통이 뱀에게 작렬했다. 그는 곧바로 구속을 풀고 쥐와 거구에게 화살처럼 돌아갔다. 정신을 차린 거구에게 뱀은 다시 몸을 맡겼고, 쥐는 봉으로 바닥을 가볍게 차며 거구의 등 위로 올라왔다. 그들은 화가 끓어오르는 듯, 대량의 입김을 내뱉었다. 네 개의 이빨의 전신 주변으로 땅이 조금씩 쿠릉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짐승의 구린내는 그가 절반 정도 먹고 남긴 털 붙은 고기의 부패한 냄새로 변해갔다.


“저희도 그 번개 같은 게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죠…“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여력이 남아있었다니, 메어는 눈을 크게 뜨고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전과 같이 수행을 되돌아보며, 그녀는 이리저리 들어오는 공격에 다시 적응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합공은 이젠 예측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속도는 문제 되지 않았다. 전혀 알 수 없는 궤도와 진행 방향. 머리카락처럼 힘없다가도 철근과 같이 들어오는 난해함. 그녀는 치고받는 것을 포기하고 방어에 온 힘을 다하기 시작했다. 수십 차례의 맹공이 들어오며, 메어의 몸 곳곳엔 가벼운 찰과상과 자상이 남기 시작했고, 기어이 메어의 가슴팍에 거구가 날린 정권이 꽂혔다. 그녀는 있는 힘껏 온몸을 틀어 치명상을 막았지만, 그럼에도 입에서 피를 내뱉으며 수 미터를 날아갔다. 그녀는 곧이어 신전 기둥처럼 굵은 나무에 등을 부딪쳤다.


“메어, 상황이 안 좋다. 어서 도망쳐야 한다!”

“알았…”


메어가 일어서는 틈을 타, 거구가 쏜살같이 달려와 바유를 팔꿈치로 쳐버렸다. 동시에, 허공으로 뛰어 다가온 쥐가 긴 봉을 이용해 나머지 옅은 이들을 공이 치듯 쏘아냈다.


“바유!!!”


옅은 이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다 땅에 박혀 정신을 잃었다. 그들은 평야를 벗어나 메어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있는 바유를 집어 공중으로 날린 뒤, 봉을 매섭게 휘둘러 머리를 땅에 박게 하였다. 시간이 멈춘 듯, 메어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몸을 돌고 있는 혈류의 소리가 귀에서 맴돈다. 눈 앞은 자정처럼 어두컴컴해진다.


“불쌍하군요.”


갑작스럽게 폐가 욱신거린다. 아까 날아왔던 정권 때문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 고통은 그녀의 신경을 더욱 우두커니 서게 만들었다.


‘생각해, 생각해… 뭘 해야 할지. 다음 수를 생각해. 생각해! 생각해!!!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멈춰버린 사고를 되돌리려 고군분투하기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심상 한편에서 과거의 일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먼 옛날, 그녀가 옅은 이였던 시절.



‘메어, 괜찮나?‘

‘응… 하지만 바유… 네 손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잖아.‘

’걱정하지 마라.’


’또… 나 때문에…’

‘내가 의지대로 한 일이니,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다.‘


‘…‘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있을 거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어… 어떻게 해야 해?‘

’상황에 휩쓸려 자신을 잃지 않으면 된다. 최고의 선택을 보여주는 거다.‘




‘…할 수 있을까?’




다시 검은 장막이 메어의 눈 앞에 드리우더니, 또 다른 기억이 그녀의 머리를 꿰뚫며 나타났다.







빙판 위에서의 한창 대련했던 순간.



‘너. 언제부터 의지색을 쓰고 있었던 거야?’

‘제가요? 어라?’


슐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메어의 몸에서 보라색 번개가 빠져나가며 위로 솟구쳤다.


‘진짜네?’

‘왠지 기이할 정도로 빨리 느나 했어. 너 대단한 걸 만들었네?’

‘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 감각을 잊지 마. 그 느낌대로 가면 돼.‘







메어가 고개를 떨궜다. 그녀의 앞으로 네 개의 이빨이 천천히 다가왔다. 정상에 서 있던 쥐는 봉을 뒷짐 진 채 어깨를 탁탁 치며, 메어를 애처로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부조리하다고 느끼시겠지만,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바람에 저항하려 하지 마세요.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 처지를요.”


그 작은 쥐는 거구의 몸에서 뛰어내려 봉을 양손으로 잡은 뒤, 메어의 머리를 노리고 거세게 찔렀다. 그 순간, 메어의 목 뒤와 발꿈치에서 밤송이처럼 첨예한 번개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고개를 치켜세우더니, 봉의 끄트머리를 정확히 쳐낸 뒤 쥐를 전방으로 걷어찼다. 거구가 눈을 부라리며 그녀를 향해 돌진하려고 했을 때엔, 그녀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거구의 뒤에 쓰러져있던 바유를 두 팔로 안은 뒤, 배후에 있던 청록색 풀숲에 몸을 숨겼다. 때마침 이곳저곳으로 날아갔던 옅은 이들이 그녀의 뒤로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미안해, 메어…”

“내가 더 미안한걸… 너희는 바유를 지켜봐 주고 있어. 때가 됐을 때 수신호를 줄 테니, 한두 명만 빼고 바로 합류해줘.“


메어는 옅은 이들을 다독여주었고, 스스로 풀숲에서 빠져나와 네 개의 이빨에게 걸어갔다. 작은 쥐는 뱀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거구의 머리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들은 무거운 숨을 내뱉으며 한없이 차가운 눈으로 메어를 지켜보았다.



“당신의 의지가 제 몸에 전율을 주는군요.“

“…“


가짓빛 영역이 거세게 파도치기 시작한다. 휘황찬란한 기세로 빛을 내뱉는 것으면서도, 앰프로 재생되는 고요한 기타 선율이 들려왔다.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번개는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마치 무덤덤하고 조용한 평정심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려내는 느낌이었다. 작은 쥐는 이전보다 더 타오르는 그녀를 보고선, 긴장 섞인 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런, 데려가기는커녕… 누구 하나 죽어도 모르겠어.“


거구가 오른팔을 땅에 내리쳐 주변을 떨리게 하였다. 곧바로 네 개의 이빨은 서로의 몸에서 떨어진 뒤,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먼저 거구가 온 힘을 다한 전력투구를 시도했다. 뱀은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일찍이 몸을 말고 있었고, 쥐는 날아가 버린 봉을 다시 손아귀에 넣곤 메어의 얼굴을 노려 찌르기를 날렸다. 이 속도라면 지친 그녀는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공격은 너무나도 쉽게 헛방이 되었다. 메어는 이미 뱀이 튼 똬리 밖으로 빠져나와, 작은 쥐의 꼬리를 붙잡아 거구의 머리에 내동댕이치고 있었다.


슐리와의 대련에서 그녀는 한계를 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체내에 의지색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뇌를 활성화해 체내에 퍼져있는 신경 다발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원리였다. 그녀의 뇌는 현재 평소보다 두 배에 달하는 정보를 처리하고 있었다. 전에 그들의 움직임이 초당 두 번 보였다면, 지금은 네 번 보인다는 것. 그녀의 신체는 그 속도에 맞춰 빠르게 반응하고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메어의 격렬해진 발길질이 뱀의 몸을 향해 꽂혔고, 그녀는 곧바로 열 손가락에 전기로 된 손톱을 세워 무참히 썰어버렸다. 깊게 베진 못했으나, 뱀은 상당히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에 축 늘어졌다. 메어는 바로 이어서 거구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고 영역을 모아 의지색을 흘려 넣었다. 그는 그대로 우레에 휩싸이며 전신을 세차게 떨었지만, 집념을 버리지 않고 기어이 메어를 뿌리쳤다.


“아직 나와 어금니가 남아있다.”


공중에 잠시 던져진 메어의 뒤편에서 작은 쥐가 혼잣말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숙이고 있었고, 두 손과 더불어 꼬리까지 이용해 봉을 잡고 있었다. 메어가 허리를 꺾어 쥐를 바라보자, 그는 봉을 굽힌 뒤 펴 반동을 이용해 그녀에게 접근했다. 메어가 땅에 발을 딛자마자, 그녀의 왼쪽 무릎차기와 쥐의 봉이 맞부딪쳤다. 가히 고속열차에 가까운 빠르기였다.


봉이 위로 들렸다가, 다시 아래로 향해 내려간다. 동시에 메어의 왼 다리도 천천히 내려온다. 그들은 서로 짜기라도 한 듯 같이 몸을 한껏 낮췄다가 세우며, 공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메어는 이전처럼 두 다리를 이용해 그의 봉술에 대항했다. 그녀의 다리가 봉을 칠 때마다, 쥐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허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두 손을 더욱 빠르게 놀렸고, 메어 역시 냉혹하게 다리를 질렀다. 용호상박의 싸움 속, 둘의 피부엔 작은 생채기가 오갔다.


그때, 메어의 뒤에서 거구가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땅이 진동할 정도로 크게 힘을 줘 뛴 뒤, 그대로 양 팔꿈치를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제때 왔군, 어금니… ?!”


“이… 녀석…!!!”


그대로 정수리에 충격을 가하는가 싶었으나, 메어는 순간적으로 의지색의 출력을 높이더니 상당한 속도로 몸을 숙였다. 쥐와 거구가 아뿔사 싶었을 땐, 그녀는 이미 공격에서 빠져나와 있었다. 메어는 전보다 더 많은 영역을 담아 의지색을 거구에게 감응시켰다. 그는 온몸이 새까맣게 그을린 상태로 몇 걸음 움직이다가, 사지가 부드득하고 꺾이며 바닥에 몸져누웠다.



“혼자 남았네.”


메어는 차가운 투로 중얼거리며, 쥐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봉을 뜨득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꽉 잡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가 씩 웃었다. 아까 쓰러졌던 뱀이 온 힘을 다해 몸을 틀고 있었다. 오로지 그녀를 물기 위한 고집 하나로 고통을 버티며, 입을 무리할 정도로 벌려 그대로 메어의 등을 향해 이륜차처럼 곧장 나아갔다. 쥐 역시 봉을 들고 그녀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 순간이었다.




“너희…! 왜 온 거야?”

“명령을 받고 왔지.”


옅은 이들이었다. 하늘에는 그들이 원 형태의 진을 쳐 네 개의 이빨을 포위하고 있었다. 쥐가 움찔하며 걸음을 멈춘 사이, 뱀의 비명이 뒤에서 잔잔히 들려왔다. 그녀가 놀란 듯 뒤를 돌아보자 전신에서 연기를 내뿜는 뱀이 늘어져 있었고, 바유가 의지색을 뿜으며 떠있었다. 그는 메어에게 다가와 그녀의 왼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까의 부상 때문인지 긴 풀로 된 간이 붕대를 머리에 감고 있었다.


“내가 내린 명령이다.”

“바유…! 괜찮은 거야?”

“나름 멀쩡하다. 이제부터 다시 돕겠다.

“다행이야… 하지만 괜찮아.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쉬고 있어.”


시종일관 냉담했던 메어의 모습이 조금은 미지근해졌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바유와 함께 쥐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봉을 쥔 채 투쟁할 의지를 내비치고 있었다.


“당신들도… 아니, 당신도 마찬가지였어.”

“칭찬 고마워.”


메어의 오른 다리가 의지색으로 휩싸이자, 작은 쥐는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이전과 같이 두 팔과 꼬리로 봉을 굽히고는, 탄성을 이용해 메어를 향해 날아갔다. 그는 입까지 동원해 처절하게 봉을 물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둘이 충돌하기 직전, 메어는 한 번 도움닫기를 한 뒤 총알과 같은 소리가 나는 발차기를 날렸다.



그러자, 둔탁한 의지색 덩어리가 메어의 다리를 벗어나 쾌속으로 전진해 쥐에게 직통으로 박혀 들어갔다.



피치못하고 결정타에 맞은 그는 의지색에 감응된 채, 나무 한 개를 처참히 부수며 거침없이 날아갔다. 그 비행은 그가 거대한 암석에 박히고 나서야 막을 내렸다. 암석의 표면 크게 진동하더니 거대한 십자의 금이 번졌다.




주변이 잔잔해지자, 메어 일행은 슬슬 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바위에 꽂혀 정신을 잃은 그는 마치 의자에 앉은듯 상반신을 새운 채 고개만을 숙이고 있었다. 그는 끝까지 봉을 놓지 않고 있었다.


“서로 도와가며 끝까지 싸우는… 이렇게 허물없고 고고할 줄이야. 다음번엔 친구로 만나자.”


메어가 눈을 감으며 경의를 표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박수와 함께 들려왔다.


“쟤네 멋있네. 누구 하나 추하지 않은 훌륭한 결투였어.”

“슐리씨…!”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왔는데, 설마 제자의 결투를 보게 될 줄이야.”


슐리가 바위의 왼편에서 웃으면서 걸어왔다. 메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의지색을 풀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는 전신이 쓰라린 것처럼 두 팔과 다리를 후들댔다. 바유와 옅은 이가 놀라며 그녀를 부축하자, 슐리는 머리카락을 뻗은 뒤 의지색을 흘려 넣었다. 메어는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네 의지색의 부작용이겠네. 힘을 얻은 만큼 느껴지는 고통도 더 한 거야. 거기에 긴장까지 풀렸으니… 뭐 괜찮아. 이 몸이 있는 동안 널 보살펴줄 테니.”


슐리가 풀어헤친 머리카락으로 그녀를 감싼 뒤 본부로 돌아가려 하자, 메어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고마워요… 그럼 이제… 다음 수련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왜죠? 아직 두 개나 남았는데…”

“저 바위를 봐봐.”


슐리의 말에 메어가 고개를 들어 쪼개진 바위를 봤다. 흑색에 벌건 느낌이 도는 밍밍한 느낌의 질감. 바로 슐리가 마지막 수련에 쓸 거라는 그 암석과 같았다.


“물론 금이 간 게 다지만, 지부 근처에 있던 거에 비해서 좀 작긴 하다만… 아무렴 어때.”

“어… 제가 그랬다고요?”


메어가 어안이 벙벙한 듯 말을 늘이자, 슐리는 큭큭대며 얘기를 계속했다.



“그럼 누가 했겠어. 그리고 아까, 번개를 잘도 쏘던데. 거의 네 키의 다섯 배는 되게 날아가더만.”

“네?”

“너, 의지색을 쓰면 다른 사람이라도 되는 거야? 왜 그것도 기억 못 해?”

“그… 그랬던가요.”

“풉, 네 육감이 해낸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네.”


그들이 얘기를 나누던 사이, 어느덧 제1지부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해는 어느새 스멀스멀 기어들어 가고 있었고, 은은한 모닥불이 작은 연회장을 빛내고 있었다.


“그래도 저, 그 바늘구멍 수련은 계속해보고 싶어요.”

“오늘은 지쳤잖아. 일단은… 소박한 축제라도 하자고.”

“좋군. 기다리고 있었다.”

“응? 바유, 너 이런 거 좋아했어?”

“아, 저번에 그게 좀… 맛있었다.”


바유의 말에 모두가 폭소했다. 수초가 흐르고 웃음이 진정되자, 슐리는 연회장에 들어가 메어를 의자에 앉혔다.


“자, 지금을 즐기자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그녀가 외치자, 어느새 분위기에 휩쓸린 메어 일행은 과일을 집어 올리며 웃음꽃을 피웠다. 제1지부의 밤의 색은 그렇게 왁자지껄하고 고즈넉하게 짙어져 갔다.







“드디어 왔네. 아, 이 녀석의 고집만 아니었어도 날아왔을 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티틀과 다예람, 그리고 사나운 부취는 긴 원정을 끝내고 본거지로 복귀했다. 사나운 부취가 걸음을 멈추자, 티틀이 그의 꼬리에 묶여있던 씰의 구속을 풀고는 뿔을 붙잡고 승강기가 있는 쪽으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예람, 따라와. 응? 근데 포폭스는 어디 갔지?”

“누가 옮겨 놓았으려나요? 침입자라도 있었나…”


티틀은 대수롭지 않은 듯 넘기며, 손을 위로 치켜 새웠다. 식충들이 하나둘 뭉치기 시작하더니, 영역의 네 방위에 있는 고목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마름모꼴의 선이 그어지며, 대지로 된 판이 밑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동안 다예람은 다리가 아팠는지 무릎을 굽히며 발을 탈탈 털었다. 티틀은 왼쪽 팔로 뿔을 만지작거렸다.


지하의 공동에 도착하자, 제이 룽이 대문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여어, 제이 룽 잘 지키고 있었…”

“…!!! 티틀 님…”


그는 무의식적으로 제이 룽에게 인사를 건네다가, 오한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다예람 역시 바짝 얼어붙으며 숟가락을 꽉 잡았다.


“유령이라도 봤나?”


말문이 막힌 둘에게 농담 아닌 농담을 툭 던진 제이 룽은, 등을 보이며 대문 쪽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힐끗 그들을 보더니 말했다.


“따라와라. 의지를 꺾는 자가 기다린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 한 토막은 그들의 가슴을 후벼 파댔다. 티틀은 애써 웃으면서 다예람의 손을 꽉 부여잡은 뒤, 제이 룽을 따라 공동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고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지만, 누군가에겐 침이 넘어가고 맥이 요동치는 아우성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심연의 동굴이 거대한 생물의 혈관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금방 그들은 절이 있는 막장에 도착했다.




“왔군요, 티틀.”


의지를 꺾는 자가 고개를 들었다. 티틀은 한껏 긴장하고 있었고, 다예람은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자꾸 자신의 팔을 터는 시늉을 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티틀은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은 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제이 룽은 그들의 뒤쪽으로 걸어가 그녀를 바라봤다. 이전보다 중압감 있는 분위기는, 그녀의 풍채가 거대해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의지를 꺾는 자이시여,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성공하셨다니, 의외군요.”

“의외라니요…”

“자, 보여주세요.”


티틀이 씰을 천천히 가져가 절의 첫 번째 다리 앞쪽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머리에서 빛을 뿜어 그것을 천천히 보았다. 수 초의 정적이 지나고, 그녀는 고개를 치켜 새우며 말했다.




“영역은 잘 느껴지지 않지만… 확실하군요.”


그녀의 말에서 긍정적인 기운이 돌자, 티틀과 다예람의 긴장이 한층 가셨다. 그때 씰이 팔로 땅을 짚더니,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신선하기까지 하다니.”



고개를 꺾은 절이 일어서는 그녀를 바라보던 찰나, 씰이 이목구비가 사라진 얼굴을 무섭게 내비쳤다. 그 모습을 보자, 공동에 있던 모두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씰의 몸이 점점 풀어지면서 오묘히 청록빛으로 번쩍이더니, 털실이 이곳저곳으로 튀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만한 티틀, 정신 차리시길. 나무에 정신팔려 숲을 보지 못하셨군요. 당신은 수호자들을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목소리를 전달한 털실의 회오리는 힘을 잃으며 이리저리 날아가더니, 땅에 툭툭 떨어지며 그곳에 있던 이들의 몸 곳곳에 걸쳐졌다.




잔향이 점점 옅어지면서 엄청난 한기로 뒤덮였다. 면같이 늘어진 실이 몸에 걸쳐진 의지를 꺾는 자는 실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느릿느릿 몸을 돌리며 티틀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웃음을 피식 짓더니 목에 힘을 주며 배짱 있게 말했다.


“음… 죄송하게 됐네요.”

“…괜찮습니다. 임무의 성패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요.”

“…?!”


의외의 답변이 돌아오자, 티틀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가 입술을 까득 깨물면서 손을 떨고 있을 때, 그녀의 온몸에서 기이하게 짙은 초록빛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공동에 눌러앉은 씰의 흔적이 연기처럼 변하더니, 의지를 꺾는 자의 피부 속으로 스며 들어가며 모습을 감추었다.


“제이 룽.”


의지를 꺾는 자가 그를 호명하자, 그는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티틀과 다예람 앞에 섰다.


“넌 사리사욕을 위하여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고,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짜 대장 노릇을 했지. 내겐 수도 없는 거짓말을 했고, 허가받지 않고 부하들을 살해해 네 힘을 키웠다.”

“…”

“답해라. 사실인가?”


다예람은 석상처럼 몸을 움직이지 않고 진땀만 흘리고 있었다. 제이 룽의 목소리에 담긴 압박감이 공동에서 사라지자, 티틀은 입을 열었다.


“그래. 사실이야.”

“그럼 대신 전하지. 이 시간부로 너희의 휘하 색채귀들을 몰수한다.”

“허?”

“티틀님 앞에서 무슨…!!!”

“왜, 이해할 수 없나?”


반발하는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제이 룽의 뒤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모습을 본 다예람이 눈을 날카롭게 뜨며 소리쳤다.


“퀴스피드, 이 배신자가!!!”

“내 주인은 언제나 의지를 꺾는 자였음.”


분노, 괴리감이 한데 뭉친 어지러운 감정이, 티틀과 다예람의 전신을 타고 돌아다닌다. 지부작족,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느낌이었다. 혼돈 속에 빠진 그들을 뒤로 한 채, 제이 룽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퀴스피드, 녀석도 데려와.”


그 말을 들은 퀴스피드는 검은 웅덩이를 만들어 누군가를 데려왔다. 그 모습을 본 티틀과 다예람은 흠칫했다. 포폭스가 두 눈을 뜨고 더욱 사나워진 모습으로 그들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 보세요- 절(折) 님의 힘이 온 몸을 타고 돌아요… 항상 이런 풍경을 만끽하셨다니, 어떤 기분이었나요?”


두 눈과 두 발을 얻은 그는 흥분하며 스산한 느낌의 목소리로 말했다. 점점 애타는 분위기 속에서 절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시길. 두 분이 일으킨 일은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아직 당신들에게 얻어갈 것이 많으니까요. 여러분은 새로운 딜러들과 함께 일하시게 될 겁니다.


에이스 딜러는 퀴스피드가 맡을 겁니다. 제이 룽은 다예람과 함께 해주세요. 그리고…”


절이 퀴스피드를 지그시 바라보자, 그는 전처럼 검은 영역을 만들어 무언가를 불러내기 시작했다. 그 기운을 느낀 티틀과 다예람은 오한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격한 감정에 비례하듯, 웅덩이는 사납게 요동치며 그 존재를 내뱉기 시작했다.


우선 쫑긋 선 두 귀가 친화적인 분위기를 보이며 나타났다. 그러나 네 방향으로 뜨여있는 동공, 팔이 잘린 채로 속박되어있는 것 같은 모습의 신체가 나타나며 괴리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네 손가락을 가진 강아지의 손 한 짝이 공중에서 날개가 펼쳐지듯 무시무시하게 드러나자, 티틀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어떻게…”

“다시 뵈니 기분이 어떠신가요? 당신의 모략에 당한 제 가여운 아이… 아, 당황하셨나 보군요. 코와와, 먼저 인사할까요?”




“…오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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