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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오버진 21화

  • 작성자 사진: : 할짓많다 HJMT
    : 할짓많다 HJMT
  • 5월 3일
  • 9분 분량


“티틀은 뭐 하고 있는 거야?! 아직도 아무 소식 없어?”

“기다리자 일단. 그 녀석이 올 때까지.”

“오고는 있는 거야? 아니, 만나기는 했을까? 못 해먹겠어. 언제까지 손님들을 기다리게 할 건데!”

“참아. 어쩔 수 없잖아, 지금은.”


짜랑짜랑한 개구쟁이 같은 육성과 축 눌러앉고 고저가 없는 목청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들은 불이 약하게 들어오는 좁은 방 안에 파묻혀 작게 웅웅대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땅, 툭하면 물바다가 되어버리고. 이딴 곳에 보낸 이유가 뭔데? 티틀 이 개자식이…”

“말이 험해, 시셀린.”

“닥쳐, 더 토 달면 네 갓을 잘라낼 거야.”

“한결같네.”


그녀는 한눈에 봐도 작고 노란 체구를 갖고 있었고, 이목구비는 마치 심술 궂은 아이와 같았다. 병아리 같은 다리, 두 팔을 타고 자라난 날개 한 쌍이 풋풋함과 어리숙함을 더했고, 그 몸에 걸쳐진 검투사를 연상케 하는 황동 갑옷을 싼 티가 나게 보이게 했다.


옆에 있던 영혼 없는 반응을 하던 이는, 초록빛의 동글동글한 몸체에 큰 두 발, 허공을 떠다니는 손 한 짝을 갖고 있었다. 그가 이고 있는 거대한 모자는 죽순처럼 말려들어 가며 회오리를 그렸고, 버섯의 갓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발바닥에는 편자가 붙어 있어 야생미를 풍겼으며, 두 눈은 검은 바탕으로 칠해져 날카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바깥에선 아무래도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있는 거처의 사방에 둘린 두꺼운 천은, 억수를 맞고 사방팔방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전달하고 있었다. 미세하게 뚫린 천장의 구멍에서는 미처 잠그지 못한 수도꼭지처럼, 구슬만 한 물방울이 맺혔다 떨어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밤스, 녀석한테 처음부터 다시 지으라고 전해.”

“이틀은 걸릴 텐데? 아무리 못해도. 그동안 비를 맞고 있을 심산이야?“

“잠시 주변으로 이탈하면 돼. 어차피 티틀은 여유롭게 쉬고 있을 텐데. 하루 이틀 답장이 늦어지는 정도야.“


시셀린이 팔에 달린 네모난 깃털들을 가다듬었다. 밤스가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갓을 고쳐 잡자, 그녀는 아무 일 없을 거라는 듯 콧바람을 불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래. 네 말마따나, 일주일 정도만 더 기다려보자고.“

“안 온다면?”

“서쪽이나 동쪽으로 올라가자고. 이런 곳에선 도저히 손님맞이를 못하겠어. 어차피 우리가 어딜 가건, 걘 다 알고 있을 거니까.“

“알았어, 따라야지. 네가 그렇다고 하면.“







“자영!!!”

“조용!!! 조용히 해!!!”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가공할 언성이 쩌렁쩌렁히 울려 퍼졌다. 메어가 한눈에 봐도 울상인 표정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슐리는 머리카락을 뻗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바유와 옅은 이들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멀리서 그녀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참을성을 길러!”

“여보세요? 슐리씨?”


그녀가 귓속말하며 촉수를 풀어헤치자, 같잖은 모습으로 사지를 퍼덕거리던 메어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때 슐리의 손에 들려있던 청록색 옅은 이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한눈을 팔고 있던 그녀는 부리나케 말을 이어갔다.


“아, 씰. 녀석은 돌려보냈어. …뭐? 티틀이 직접 본진에 쳐들어왔다니?”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슐리는 못 믿겠다는 듯 눈을 굴리더니 미간을 올렸다 내리며 그녀의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메어는 어렴풋이 ‘티틀’이라는 단어를 들었지만, 힘이 너무 빠진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렇게 대략 십여 분 정도가 흐르고 나서였다.


“응, 한 아이가 와서 말이야. 잠시 보호해주고 있었지. 마니악 메어라고 해.”

“마니악 메어… 아, 뵈었던 적이 있어요. 몇 달 전이었던 것 같네요.“

“알고 있었구나? 이 아이, 티틀 녀석 때문에 자영이랑 헤어졌다 하더라고. 다시 만나고 싶어하더라.“


“정말인가요?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네요. 자영 씨는 여기에 계세요. 그날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구출할 수 있었어요.“


“그래? 그거 정말 잘 됐네! 오랜만에 안부도 물을 겸, 좀 바꿔줄래?


그 말을 듣고 있었던 메어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슐리가 있는 쪽으로 목을 쭉 빼며 다가가 그녀의 근처를 기웃거렸다. 슐리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통화를 이어나갔다. 잠시 후, 씰의 옅은 이에게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했더니, 제1지부장이시네. 오랜만이야.”

“목소리에 힘이 넘치는군. 너, 자영 맞아? 너스레도 떨고.“

“내가 아니면 누구겠어. …그나저나 그 말, 사실이야? 마니악 메어가…“


“자영!!!”


다시 한 번, 어마어마한 고함이 방 안을 진동시키며 메아리쳤다. 슐리는 너무 깜짝 놀란 나머지 옅은 이를 떨어뜨리며, 온몸의 머리카락을 빳빳이 새웠다. 지루한 대화에 지쳐 잠에 빠진 바유와 옅은 이들도 몸에 번개가 친 것처럼 움찔거리면서 일제히 깨어났다. 그 틈을 타 메어가 울먹거리며 씰의 옅은 이를 집어들었다.


“자영!!!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어… 여보세요? 슐리?“

“얘기하고 있으면 끊지 말라고!”

“아, 알았어요… 너무 반가워서… 그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정신을 차린 슐리는 곧 표정을 구기며 그녀의 손에 들린 옅은 이를 낚아챘다. 그러곤 그녀를 향해 머리카락 두 덩이를 뻗어 얼굴을 손뼉치듯 짜부라뜨리며 호통쳤다. 머리카락이 떼어지자, 그녀는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다시 바닥에 널브러졌다.



“미안, 메어가 좀 난리를 피워서 말이야.”

“정말로… 데리고 있었구나. 다행이야.“

“이제 함께 얘기해보자고. 괜찮겠지?”

“좋아.”


대답을 들은 슐리가 메어에게 손짓하자, 그녀는 두 눈에 불을 켜며 달려왔다.


“영역이랑 의지색. 나쁘지 않더라고. 잘 가르쳐놨어.”

“자… 자영, 오랜만이야.”

“아까까지 소리 지르던 깡은 어디로 가셨을까?”


바람 끼며 달려온 것과 대비되게, 메어는 잔뜩 위축된 듯 굽이굽이 거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슐리는 그 모습이 우스운지 어깨를 토닥이며 긴장을 풀어줬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메어는 아직, 세상을 헤쳐나가기엔…“

“충분한걸. 여기에 오기 전부터 티틀의 부하들과 싸워왔어. 그러니 여기에 있는 거 아니겠어? 물론, 이 몸의 수련이 한몫했지만!”

“그나저나… 너, 할 말은 없어?”

“…네?”

“아까까지 그렇게나 얘기하고 싶어했잖아. 막상 다가오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버렸나?“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준비가 안된 듯 머뭇거리는 메어를 보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메어가 고심하는 동안, 슐리는 제자의 무용담을 멋지게 각색해 자영에게 들려주었다. 십 초도 안되어 채찍 수십 대를 맞고 빙판 밑으로 빠져버린 나날이라든지… 의지색을 자신의 얼굴에다가 쏴버린 부끄러운 실수라든지… 웃기면서 창피했던 일들은 모두 용맹한 도전으로 포장되어 자영의 심금을 울렸다. 바유와 옅은 이들은 이를 어처구니 없이 듣다가 따분해졌는지 금방 눈을 붙였다.


“네 개의 이빨을? 거짓말…“

“온 힘을 다했지. 메어와 바유 그리고 친구들 모두.“

“우왕좌왕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정말 많이 늘었네.”


메어는 그 대화에서 상당한 따뜻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영이 조금씩 보여주었던 온정의 색깔. 불신에 가려져 있었던 정의의 마음. 아직 부끄러움이 묻어있었지만, 전과 달리 그 모습을 오롯이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잡념을 떨친 듯, 슐리에게 다가가 옅은 이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아… 안녕. 다시 인사하게 됐네.”

“메어구나. 잘 지냈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괜찮아!“

“슐리가 못살게 굴진 않았지? 수행은 편했어?”

“잠깐, 이 몸을 뭐로 보는 거야!”


그녀들의 정겹고 훈훈한 재담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이어졌다. 이야기가 막바지로 접어들어 가자, 화제는 자연스럽게 만남의 장소로 흘러가게 되었다.


“안부 인사는 이쯤 하면 된 것 같네. 나랑 수호자들도, 얘기할 게 너무 많아서… 나머진 만나서 하자.”

“응…! 그런데 어디서 만나지?”

“북동쪽이 좋을 거야. 의외로 평화로운 곳이거든.“


“그런 거라면 날 빼놓으면 섭섭하지!”

“큐 파인드?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자영도 마찬가지야! 내 에디랑 지미가 있다면, 더 빨리 갔다 올 수 있지. 무엇보다 안전하잖아?

“우… 우와… 큐 파인드 님도 오신다니…”


“그래, 그러면 굳이 중간에서 만나지 않아도 되겠네. 조금만 올라와 줘. 참, 지도는…“

“그건 걱정 마! 동쪽에서 만난 친구가 줬어.”

“친구? 누군지 궁금해지는걸. 나중에 만나면 알려줘.”


“언제쯤 떠날래? 이 몸이야 언제든 상관없지만, 제자를 빈손으로 보내기엔 아쉽단 말이지.”

“빨리 만나보고 싶어요. 저는 괜찮으니…”

“그래도 늦었으니까, 적어도 오늘은 자고 가라고.”

“푹 쉬고 와. 슐리, 메어가 출발할 때 연락 부탁해.”

“당연하지. 오랜만에 목소리도 듣고 좋았어. 아, 어리랑 치즈에게도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줘!“




드디어 만날 수 있다.


아직도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조차 실감이 가지 않았다. 고대했던 일이 이루어지니 공허하면서도, 즐겁다는 미묘한 감정이 밀려 들어왔다. 입가에는 참을 수 없는 미소가 가득했고, 심장의 미세한 고동이 가슴을 타고 목까지 올라와 뜨거운 열기를 일으켰다.


어느 때부터 알아봐야 할까? 뛰어갈까? 고개를 돌리고 못 찾는 척을 할까? 행복한 나머지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모습을 들킬까 봐, 얼른 바닥에 누운 뒤 얼굴을 가릴만한 담요를 끄집어 오려던 찰나였다.


“뭐해?

“네?”


슐리와 눈이 마주친 메어는 잠시 당황하다, 곧 손에 쥔 담요가 기묘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슐리의 치맛자락이었다.


“여기 있어. 그리고, 그렇게 숨길 필요 없다고. 그리운 친구와의 만남인데 누가 놀리겠니.“


그녀는 손에 잡혀 있던 옷을 빼 와 메어의 오른쪽 뒤편에 있던 담요를 들어 무릎 위로 덮어주었다. 메어는 잠시 어수룩한 표정을 짓다, 눈웃음을 지으며 무언의 감사를 표했다. 담요의 따스함을 받은 메어는 슬금슬금 눈을 감기 시작했고, 슐리는 조용히 그녀가 잠이 드는 것을 지켜보며 스르륵 구석으로 들어갔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침대의 모습으로 변한 그녀는 천천히 잠자리에 들었다. 유난히 그날의 조명은 보고만 있어도 하품을 하게 되는, 온화함을 풍기고 있었다.




“우와, 이게 다 먹을 거라고요? 이런 건 처음이에요…”

“기대해도 좋아. 이런 건 이 몸 전문이니까.”


이틀 뒤, 연회장에서는 요리가 한창이었다.


과육을 얇게 저민 것을 끈적거리는 엿에 빠뜨리고, 달달 시큰한 가루를 묻혀 굳힌 강정. 계피 맛이 나는 나무뿌리를 말리고 매콤한 기름에 바삭하게 튀긴 튀김. 애벌레 옅은 이의 탈피껍질을 쪼개 알싸한 향신료 탕에 담가 끓여낸 떡까지. 과자들은 양념을 한가득 머금은 채 얇은 종이를 두르고 바구니 안에 정갈히 쌓여 있었다.


슐리는 요리가 올려진 테이블 옆에서 큰 국자를 들고, 항아리에 담긴 불그스름한 액체를 휘젓고 있었다. 파도치는 벌건 물에선 산미와 함께 코를 찌르는 듯한 피톤치드의 향이 올라왔다. 소용돌이가 두세 바퀴를 돌았을 때마다 가장자리에서 크고 작은 거품들이 톡톡 터져나가는 것이, 진하게 숙성된 적색 과일들의 아우성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 됐다. 메어, 그것 좀 가져와 줄래?”

“네!”



메어가 테이블에 기대어져 있던 홀쭉한 가죽 물통을 끌고 왔다. 바람 빠진 호리병 같은 모습을 한 그것은, 족히 칠팔 키로의 액체를 담을 수 있어 보였다. 슐리는 머리카락을 펼쳐 물통의 입구를 벌린 뒤, 국자를 이용해 빨간 물을 천천히 옮겨 담기 시작했다.


어느새 통은 빵빵해졌고, 그녀들은 머리 부분에 작은 찻잔 같은 것을 씌운 뒤 굵은 실을 이용해 그것을 완전히 봉했다. 이어서 메어와 옅은 이들은 낱개로 포장된 간식들을 등에 멜 수 있는 짚 가방 안에 차곡차곡 쌓아 넣었다. 과자들이 어찌나 많던지, 슐리가 건네준 씰의 작은 옅은 이가 찌부러져 종잇장처럼 얇아져 있었다.


잠시 후, 메어는 자신의 키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부푼 커다란 짚가방을 둘러업고, 물통을 바유에게 맡긴 채 회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쫓긴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자유로운 영혼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면, 슬슬 가볼게요.”

“신세를 많이 졌군.”

“잘 가! 먹을 거 갖고 싸우지 말고, 몸조리 잘해!“


짧으면서도, 하염없이 긴 인사였다. 몇 초도 되지 않는 대화에서 그들은 많은 감정을 느꼈다. 만남, 수행, 고난, 이별. 그 무게는 차마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무거웠다.


천천히, 메어는 발을 돌렸다. 바유와 옅은 이들도 그녀를 따라 날아갔다.




“그리고, 언제 다시 만나자고!”












“당연하죠!”


슐리의 굳센 외침이 들려오자, 메어 일행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손을 높게 흔들며 웃고 있었다. 이에 질세라, 그들도 눈과 입이 초승달 모양이 되도록 방긋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손을 맞들어 하염없이 흔들다가, 시선을 서서히 옮기며 여행길에 발을 디뎠다. 제1지부의 정겨운 냄새가 사라지자, 또 익숙한 풍경이 그들을 맞이했다. 굳게 얼은 호수. 그 수면에 새겨진 잊을 수 없는 기억의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슐리와의 대련으로 생긴 수많은 깨진 자국은 무수한 빛의 반짝임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네 개의 이빨과 싸우며 갈라진 원형의 흉터에는 어느새 새로운 물이 차올라와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새로운 도화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호수의 반대편으로 넘어가자, 새하얀 땅은 점점 질어지며 종적을 감추었다. 곧이어, 그들의 앞으로 미지근한 느낌의 바람이 슬며시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날의 일을, 모르고 있다 생각하셨나요? 저를 너무 과소평가한 건 아닌지…“


의지를 꺾는 자가 고개를 겁에 질릴 정도로 가깝게 뻗었다. 티틀은 분명히 몸을 떨고 있었지만, 어디서 오는지 모를 만용의 빳빳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뭐, 인정하겠습니다. 그때 코와와한테 장난을 치긴 했으니까…”



그때, 티틀의 시야가 갑작스럽게 좁아지더니 점점 뒤틀리기 시작했다. 흘러내리는 거품처럼 그의 눈에 비추는 모든 것이 융해했고, 그렇게 녹은 사물들은 사방팔방에서 그를 향해 다가왔다. 형언할 수 없는 그 액체들은 점점 기괴한 모습으로 변해 소음을 내지르며 티틀의 몸을 휘감았다.


“잔재주가 늘었네? 코와와.“


괴성을 뚫고 티틀의 목소리가 메아리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지극히 평범한 풍경이 펼쳐졌다. 공중에 떠있었던 코와와는 어느새 그의 뒤에서 발을 붙인 채 뒷머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티틀이 장난삼아 그를 향해 작은 식충을 날렸지만, 그것들은 조금도 전진하지 못한 채 몸을 부들거리며 땅에 곤두박질쳤다.


“파면되어서 힘을 잃었을 네가 어째서?“

“잃었다? 웃기는 소리.”

“무슨…?“


앳되지만 잡음이 섞인, 평범한 이라면 듣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것 같이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는 티틀을 실실 비웃듯, 그의 앞으로 사뿐히 걸어왔다.


“총애하는 나를 조건에 키워주실 리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데.”

“그런 거구나. 나에게 직접 영역을 주지 않은 이유가.“


티틀이 의지를 꺾는 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하자, 그녀는 머리의 뿔에서 기분 나쁜 광을 뿜어댔다.


“그 태연함은… 객기 그 자체. 알고 있을 텐데 말이죠. 당신의 힘은 저에게 묶여 있다는 걸… 두렵지 않나요?“

“두렵습니다.”


말과는 상반되게, 그는 씩 웃으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떳떳한 모습을 본 공동 안의 모두는 목 뒤와 양 볼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제 능력을 잃고 싶지 않으실 테니.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겠죠. 그나저나 이렇게 예상치 못한 때에 시련이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무엇이든 알고 있었다는 듯 허언을 하고, 여유로운 척을 하며 감정을 숨겼다. 어떤 것이든 대비하고 있었다며 가짜 웃음을 지었다. 실상 그는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목이 달아날 수 있다고, 장이 터져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곧 티틀은 절을 향해 초점 없는 두 눈을 크게 부라렸다.



“모든 걸 알고 계셨는데, 제게 숨이 붙어있다는 건 그런 이유지 않겠어요?”


미친 소리였다. 그의 처지에서 도박과도 다름없는 말을 듣자, 절은 소름 끼치게 웃어댔다. 그 실소가 잦아들자 그녀는 상냥한 느낌의 빛을 한껏 내비쳤다.


“아, 정말 마음에 드는군요… 그 총명함. 두려움을 모르는 추악한 의지… 아직 간판에 그 이름을 걸어도 상관없겠군요.”


그녀는 점점 고개를 들어 굽었던 목을 모두가 보이는 곳으로 쭉 폈다.


“그의 권한은 뺏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은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이 룽은 상당히 격앙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약속이 다르지 않나!”

“이제 저흰 숨길 게 없습니다. 모든 일은 저와 코와와의 통제하에 돌아갈 겁니다.”


한참 예의 없는 투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럽게 그의 말을 일축했다.


“주인님의 뜻이라면, 존명 합니다.”

“…”


그의 얼굴에선 숨길 수 없는 화가, 찌부러진 미간의 굴곡을 따라 그려지고 있었다. 옆에 있던 코와와는 상관없다는 듯, 두 눈을 감고 공손히 손을 모아 머리를 숙였다. 그 시종과 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핏대가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애써 모멸감을 참으며 시선을 돌렸지만, 그곳에선 티틀이 실실거리며 짜증 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예람 역시 긴장이 풀린 듯 눈웃음을 지으며 그를 떨떠름하게 만들었으니, 어딜 봐도 노여워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이 얼굴들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건만.“

“딜러에게 상하 관계는 없습니다. 이제 모든 명령은 제가 직접 내릴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길.“


말을 끝마친 그녀는 앞다리 하나를 새운 뒤, 땅을 강하게 치며 먼지를 일게 했다. 그 굉음은 굴을 강렬히 떨게 했고, 모두의 이목은 의지를 꺾는 자에게 쏠렸다.




“자, 이제 중요한 얘기를 해보죠.”


그녀의 온몸에서 전과 같은 녹빛이 맴돌더니, 곧 동굴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보이지 않던 막장의 구조물들이 빛을 받아 그림자와 함께 모습을 보였다. 동아줄처럼 얇은 나무뿌리가 혈관처럼 벽을 두르고, 초록빛의 줄기가 이리저리 엉켜 그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공간에서 나오는 중압감은 칠흑에서 오는 두려움보다도 거대했다. 초조함이 아른거리는 가운데, 그녀가 입을 때었다.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실패했지만, 동시에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죠. 그들보다 먼저 움직일 준비를 하겠습니다. 우선 퀴스피드와 포폭스는 밖에서 대기해주세요."

"확인."

"알겠어요."


퀴스피드와 포폭스가 사라지자, 절은 티틀을 향해 목을 꺾은 뒤 말했다.


“사라진 전력은 모두 파악했습니다. 각지에 남아있는 이들에게 천천히 귀환 명령을 내려주세요. 코와와의 호위들은 어디에 있죠?“

“마지막으로 연락한 지 꽤 되었습니다만…“

“병력이 모두 모인 후 복귀하도록 일러두시길.”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죠?”

“영역이랑 의지색, 아직 수복하시지 못하셨을 텐데…”


“괜찮습니다. 그건 시간문제일 테니.”


“…?“


“초록빛의 풀밭을 위하여.“


의지를 꺾는 자가 말을 끝마치자, 코와와가 대뜸 끼어들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듣는군요. 그래요, 이제 제 충견이 돌아왔으니… 여러분도 따라 복창하시길. 저의 뜰, 저의 풀밭, 저의 세상을 위해서.“


“초록빛의 풀밭을 위하여.”


의지를 꺾는 자가 흐뭇해하자, 이에 부응하듯 코와와가 다시 한 번 외쳤다. 공동 안의 그들은 못마땅했지만, 그 엄숙함에 짓눌려 합창했다.



“초록빛의 풀밭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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